100km이상 기맥.지맥/영산기맥(완주)

영상기맥 4구간(사동고개=>불갑산(영실봉)=>지경재)

부뜰이(윤종국) 2019. 1. 1. 11:48



영산기맥

부뜰이와 천왕봉이 걸어온 영산기맥

기맥길78(접속4.1km/이탈km)/44시간33분


산행일=2018년12월22일

산행지=영산기맥 4구간(영광/함평)

산행경로=사동고개=>분성산(318m)=>300봉=>창호=>연정재=>273.2봉=>>칠봉산=>200봉=>뱃재=>가재봉(9281m)=>가재봉(277.7m)=>횐바위재=>254봉=>횐바위=>260봉=>273봉=>밀재(선치)=>311.2봉(H)=>250봉=>용문봉(358m)=>장군봉=>노루목=>불갑산(연실봉516m)=>부처바위=>구수재=>용봉=>용천봉(용출봉347.8m)=>모악산=>283.4봉=>한우재=>노은재=>230봉=>230봉=>깃대봉(210m)=>화신골재=>170봉=>210봉=>161봉=>지경재

거리 및 소요시간=20.7km/11시간34분


지난주에는 한강기맥을 마무리 짓고 이번주에는 진행하다 멈춘 영산기맥 두 구간을 이여볼 계획인데 어찌어찌하여 소슬바람님 부부와 함께하기로 하고 금욜저녁 7시가 조금넘은 시간에 인천을 출발한다.

11시가 넘은 시간에 날머리인 지경재에 도착하니 소슬바람님 차량이 보인다.

우리도 저쪽에 자리을잡고 쉬는 시간을 갖는다.

쉬는 중에 서너번 잠이깨고 시간을보니 새벽3시가 다 되였다.

그만 움직입시다. 라고 카톡을 보내고 몇분 기다려도 응답이 없어서 전화를 하니 어디에 있냐고 한다.

산행전에 간단히 요기를 하자고 하니 된장국에 밥을 준비 했다고하며 들머리에 가서 먹자고 한다.

소슬바람님 차량을 날머리인 이곳(지경재)에 두고 내차로 들머리인 사동고개로 출발했는데 도착해서보니 엉뚱한 곳인 상무대예비군훈련장에  도착한다.

재 검색을하여 상무대골프장 입구인 사동고개에 도착하고 보니 차량알바을 30분 넘게해서 귀중한 시간을 허비했다.




영산기맥 4구간 들머리인 사동고개(沙洞)는 영광군 묘령면 월암리 사동마을에서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덤바위재 라고도 하는데 고개아래에 있는 사동마을에서 따온 지명으로 대밭과 모래가 많아 사동이라 하였다고 한다.

사동마을은 200여년전 밀양 박.씨(.)에 이여 영월 양.씨(羊.)가 이주하면서 마을이 번창했다고 하며 대밭과 모래가 많아 사동(沙洞)이란 지명이 생겼고 고개 넘어쪽으로는 상무대 골프장이 있다.


사동고개 4각정 쉼터에서 소슬바람님 엄마표 된장국에 밥을 한덩이씩 마라먹고 산행을 시작한다.




오늘은 새로장만한 카메라로 첯 인증사진을 찍어 보는데 어째 화질이 마음에 안든다.

성능은 분명히 전에거 보다는 나은 것이니 조작 미숙일 것이다.


도로가에 옹벽을 올라서면서 오늘산행이 시작되는데.

올라 서자마자 대나무숲이 나타나고 길이 분명치가 않고 이리저리 갈라지는 미로같은 길을 올라가니 잡목숲에 깃대가 세워저있다.

깃대가 세워진 봉우리에 올라서면 좌측에서 올라오는 길에 합류하고 완만하게 진행되다가 봉우리에 올라서면 분성산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23분만에 오늘의 첯산인 분성산에 올라선다.

분성산(318m)은 장성군 삼서면 대도리와 영광군 묘량면 월암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장성쪽 아래에 상무대 골프장이 있고 정상에는 조금 넓은 공터에 조그만 분성산이란 정상석이 서 있고.산행지도에는 장암산이라 표기되여 있는데. 영광이나 장성에는 분성산이란 산 이름이 없고 유래를 찿을 수가 없다. 

장암산도 영산기맥에서 벗어나 장암지맥에 있는 산으로 지난회차에 스쳐 지나온 산인데 산행지도에는 이곳에 별개로 장암산이라고 표기되여 있어서 혼동이 되는 부분이다.





분성산에서 내려서는 길은 온갖 넝쿨과 잡목을 뚫고 내려간다.


분성산에서 30여분 진행면 기맥길은 좌측으로 꺽어지고 직진방향으로 삼각점이 있는 월암산 방향이다.

오늘은 시간도 넉넉하여 월암산을 둘러보구 올 생각으로 월암산 방향으로 진행하는데 넝쿨과 잡목이 얼마나 엉켜있는지 도저히 진행을 할 수가 없서서 되돌아 와서 좌측으러 내려선다.


조금 내려가니 길은 히미해지고 이리저리 사방으로 각자 흩어져서 길을 찿는다.


육군공병학교장 이름으로 내 걸은 출입금지 경고문이 자주나온다.


히미한 길을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면서 내려서니 시멘트 임도길이 나오고 여기 위치가 지도상에 연정재 이다.

연정재(225m)는 영광군 묘량면 연암리 연정마을과 장성군 삼서면 월계리 관동마을을 잇는 고개로 시멘트로 포장되여 있다.

 

연정재에서 임도를 횡단하여 전봇대에 표지기 하나달고 진행한다.


연정재에서 30여분 진행하니 또 다른 임도 삼거리에 내려서고 임도 삼거리에서 도로을 건너서 잡목이 무성한 숲속으로 들어간다.


오래전에 지나간 듯한 산꾼님의 표지기를 만나고.


연정재에서 273.2봉을 넘고 칠봉산은 언제 지났는 지도 모르게 지나고 뱃재에 내려서는데.

사람의 발길이 끈긴지가 수십년은 지났는지 겨우 흔적만 남아있다.

뱃재는 영광군 묘량면 연암리와 함평군 월이면 월계리를 잇는 옛 고개로 지금은 겨우 흔적만 남아 있다.


겨우 흔적만 남아있는 뱃재를 지나고 봉우리하나 올려치니 281봉인 가재봉이다.


가재봉에서 살짝 내려섯다가 다시 올라서면 비슷한 높이의 또 다른 가재봉에 올라서게 되고.두개의 가재봉을 올랏다 내려서면 산행지도에는 힌바위재 라는데 재라기보다 그냥 안부정도로 보인다.


힌바위재에서 254봉을 올랏다 내려서니 커다란 바위가 하나있고 지도에는 힌바위라고 표기되여 있는데 이 바위를 흰바위라 하는거 같다.


흰바위에서 260봉과 273봉의 잡목을 헤치고 내려가면


깔끔하게 정리된 어느 가족묘지을 지나고


22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밀재에 떨어진다.


밀재에서 함평군 월아면 용정리 방향.


밀재에서 영광군 묘량면 연암리 방향.


절개지 중간부분에 밀재 표지석이 있다.

밀재는 영광군 묘량면과 함평군 해보면을 연결하는 22번 지방국도가 지나는 고개이며 내륙과 해안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 이였는데. 지금은 이 고개 아래로 터널이 뚫리면서 이제는 차량통행이 거의 없는 옛 길이 되였다.

또다른 이름으로는 매미 선() 고개 치()를 써서 선치()라고도 부른다.



도로를 횡단하여 전망좋은 곳이라는 임도길로 들면


불과 1분거리에 이정목이 서있고 등산로란 곳으로 올라간다.


등산로라 가리키는 방향으로 올라가면 어느 최씨가문의 커다란 묘지를 지나고 잘 정비된 등로가 조망좋은 헬기장까지 이여진다.



헬기장까지 잘 정비된 길을 올라간다.


헬기장이 있는 309.4봉에  올라서면 좌측으로 조망이 시원하게 열린다.

미세먼지는 좀 있지만 지나온 기맥 마루금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앞쪽으로는 진행해야될 불갑산(영실봉)이 위용을 자랑한다.


좌측으로 내려다보이는 해보면 평야가 엄청나게 넓다.

건너편에 아련하게 보이는곳이 광주에 무등산이지 싶은데 짙은 미세먼지로 인해서 구분을 할수가 없다.

조망좋은 헬기장에서 아침식사를 하기로 한다.


날도 포근하고 거의 한시간을 머물다가 일어난다.


기맥길과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300m위치에 수암산이 있다고하여 바라보니 봉우리 비슷한 것도 안보인다.

그래도 궁금하여 가보는데 400m이상을 가도 봉우리가 없어서 되돌아 온다.


헬기장에서 충분히 휴식를 취하고 가파르게 내려가면 임도길에 떨어지면 여기위치가 금산고개이다.

금산고개는 함평군 해보면 금계리와 영광군 묘량면 연암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고개의 유래는 분명치 않지만 고개 아래에 있는 금계리 금산마을에서 따왔을거란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 많은 산꾼들이 마루금을 포기하고 좌측 아래에 용문사쪽으로 도로를 따라 노루목까지 편안한 길로 진행했다고 한다.


우리는 우측에 임도길로 최대한 마루금에서 가깝게 치고 오른다.


임도길도 벌초를하여 이만하면 지맥길에서는 고속도로나 다름없다.


그런데 벌초를한 임도길이 10여분 걸으니 벌초는 여기까지이고 까시 잡목이 길을 막는데 뚫고 나갈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그렇다고 아니갈 수도 없다.


이구간이 원체 험한 곳이라 계절도 겨울을 택했고 가시잡목에 대비해서 두꺼운 옷을 입고 왔으니 그대로 밀고 들어간다.


소문대로 엄청난 잡목에 급 오름길을 40분동안 용을쓰고 오르니 용문봉에 올라선다.


40분이 넘게 용을 쓰고 올라섯는데 겨우400m도 안되는 봉우리다.




용문봉에서 배냥내리고 물도 마시고 과일도 먹으며 쉬는 시간을 갖는다.

그렇다고 여기서 고행이 끈난것은 아니다.

오늘산행 20km중 이제 절반인 10km을 진행한 지점이다.


용문봉에서 슬쩍 내려 섯다가 또 한차레 올려치면 통신철탑이 나타나고 장군봉을 오를려면 좌측에 임도길로 우회해서 올라야 한다.


오늘 소슬바람님이 감기몸살기가 있어서 많이 힘들어 한다.

내일 하루더 산행을 해야 하는데 걱정이 안될수 가 없다.

오늘밤을 지나고 좋아져야 할텐데....


통신탑이 보이는 곳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잡으면 금산고개에서 용문사앞으로 올라오는 임도길에 합류하여 장군봉을 우측에 두고 노루목까지 임도길로 올라간다.


금산고개에서 시작된 임도길에 합류해서 노루목까지 올라간다.


우측에 육각정자도 지나고.


선답자들의 후기를 보면 몇년째 같은 위치에 주차되여 있는 무쏘을 우리도 만난다.


우리가 올라온 곳은 밀재이고 장군봉은 우측으로 0.33km이고 우리는 군부대 철조망을 좌측에 두고 연실봉 방향으로 올라간다.


무쏘가 주차되여있는 여기 위치가 노루목(439m)


노루목에서 영실봉 가는길은 위험한 길과 안전한길로 나뉜다.

우리는 위험한길로 올라간다.


돌계단을 올라서면




지나온쪽으로 조망이 열린다.




자세히보니 새벽에 산행을 시작한 사동고개 위치도 가늠이 된다.


오늘 날씨가 미세먼지 나뿜이라 했는데 그나마 이만큼 보이는 것도 감사하게 여겨야 한다.


위험한 길이라 했지만 안전시설이 잘돼 있어서 크게 위험하지 않다.




좌우가 수십미터 낭떨어지 이다.


바위밑은 수십미터 절벽이다.




바위틈새도 빠져 나가야 한다.


108계단을 올라가면 오늘 구간의 최고봉인 불갑산(연실봉:516m)에 올라선다.






연실봉(蓮實峰:516m)은 영광군 불갑면과 함평군 해보면의 경계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불갑산의 주봉으로서 산 정상의 형상이 연꽃열매 모양을 하고 있는데서 이름 하였으며 주변 상산들이 연꽃 잎처럼 감싸고 있어서 산 전체가 연화형국을 하고 있는 영산(靈山)으로서 영광의 정기가 이곳에서부터 발원하고 있다한다.

불갑산은 천년고찰 불갑사를 품고 있어 더욱 이름이 잘 알려진 산이다.

본래 이름은 모악산으로 산새가 부드러워 산들의 어머니라는 뜻에서 얻은 이름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불갑산으로 이름이 바뀌였다.

이는 산이 품은 불갑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불갑산은 백제 때 창건한 고찰 불갑사를 품고 있고 낮은 높이에도 빼어난 조망으로 이름난 산이다.

불갑산의 본래 이름은 모악산이라 불럿는데 백제시대에 불교의 불()자와 육갑갑자의 으뜸인 갑(甲)자를 딴 불갑사가 지여지면서 산이름도 불갑산으로 바뀌였다고 한다.

  







불갑산 정상에는 연실봉이라 셔겨진 정상석과 2등 삼각점과


영광군에서 설치한 조망 안내도와


함평군에서 설치한 관광 안내도가 있다.


방금전에 지나온 장군봉과 군부대


그리고 아침내내 걸은 영산기맥 마루금과 지난 회차에 걸은 장암산과 태청산이 아득히 조망된다. 


정상석 뒷면.


연실봉을 내려와서 돌아본 암릉


연실봉을 지나면서 일반 등로길을 걸으니 세상에 이리편할 수가 없다.


연실봉을 내려섬과 동시에 길은 한없이 좋고 금새 사각정이 있는 구수재에 내려선다.

 

구수재에 이정목 지나온 연실봉이 1.5km이고 진행방향으로 용천사가 1.03km라고 안내한다.

구수재(223m)는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와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를 잇는 고개로 고개를 경계로 좌.우에 있는 용천사와 불갑사를 연결하는 고개인데 예전에 두 사찰의 스님들이 교류하는 통로였고 신도들이 불공을 드리기 위해 넘엇던 길이였으며 숯을 구워팔아 생계를 유지했던 숯쟁이들도 나무을 구하고 또 영광에 숯을 내다 팔기위해 이 길을 오갔던 고개라 한다.

구수재를 깃점으로 불갑산과 모악산으로 나뉘는데 두 산의 모양도 전혀 다르다.

불갑산은 주봉인 연실봉 주변으로 기암괘봉이 옹골차게 들어앉자  남성다운 반면 모악산은 언뜻 보기에도 부드럽고 아늑한. 이름 그데로 어머니의 산이다.


구수재에서 4분여 진행하면 용천사 방향은 부드러운 임도길이고 기맥길은 히미한 용봉 방향으로 올라간다.




갈림길에서 10분동안 낑낑거리며 올라서니 사각쉼터가 있는 용봉에 올라선다.


용봉(龍峰)에 있는 이정목엔 모악산이 0.2km이고 노은재가 1.5km라고 안내한다.




편안한 안락의자가 나오면 한번정도는 누워줘야 예의일거 같다.


지도에는 여기 위치가 모악산(母岳山)인지?.용천봉(龍泉峰:350m)인지? 이정목에는 모악산이 좌측으로 0.6km라고 안내한다.

삼각점도 여기에 있고 조금전에 용봉에 이정목에는 모악산이 0.2km했는데...많이 헷갈린다.

이정목도 두개나 서있다.


모악산의 삼각점


같은 위치에 삼각점과 함께 서있는 이정목.


모악산에서 7분 걸으니 지나온 모악산이 0.32km이고 직진방향으로 태고봉이고 기맥길은 좌측 한우재 방향으로 내려선다.


아래로는 미세먼지가 자욱한데 높은 하늘은 이렇게 맑을 수가 없다.


좌측으로 주차장0.45km라는 이정목이 나오면 여기 위치가 노은재.

노은재(老隱峙:253m)는 함평군 해보면 용암리와 영광군 불갑면 자비리 노은마을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용암리에 있는 용천사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은 이정표도 있고 뚜렷하나 정작 고개의 이름을 따온 노은마을 쪽은 아예 길이 보이지도 않는다.

노은()마을은 고흥유씨가 처음 조선조 세조때부터 살기 시작하였으며 젊어서는 속세에서 생활 하였고 늙어서는 은둔생활로 자기 수양(修養)을 하기위해 찿아 들어 마을을 형성 했다하여 노은()이라 하였다고 한다.

노은재를 지나면서 등로는 전형적인 지맥길로 급변하며 사나워 진다.






육군보병학교장 명의로 세워진 경고판.


오늘은 휴일이라 사격이 없는 날인데 붉은 깃발이 올라가 있다.


여기서 마루금을 그려본다.

저수지 직전에 사격장이 보인다.

파란지붕 건물 우측으로 올라가야 한다.

임도길에 내려서고 사격교육장 건물 됫쪽으로 진행한다.

여기 위치가 지도상에 화산골재이다.

화산골재는 함평군 신광면 원산리에서 영광군 불갑면 우곡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육군보병학교 사격장이 있고 고개에는 군 교육장이 있다.


교육장 뒷쪽으로 올라가면 군 훈련 시설이 조금 있고 군부대 사정권을 벗어나면 쓰러진 통나무들과 가시잡목이 극에 달한다.

그래도 겨울이라 가시잡목에 대비해서 두꺼운 옷을 입어서 큰 상쳐없이 오늘 산행을 마무리 할수 있었다.


사격장을 지나고 서너개의 봉우리를 넘으니 마루금에 민가가 한체있고 똥깨두마리가 엄청 짓어댄다.




사격장만 지나면 금방 나타날 것 같은 날머리가 가도가도 끝이 안보이더니 이제야 날머리인 지경재가 보인다.

여기에서 지경재를 바라보며 밭으로 내려선다.


어잿밤에 주차해둔 소슬바람님 차량이 보이고 소슬바람님 차량으로 새벽에 산행을 시작한 사동고개로 가서 내차를 회수하여 내일 산행 날머리인 함평생태공원으로 이동한다.


지경재에서 영광군 불갑면 우곡리 방향.


지경재에서 함평군 신광면 합정리 방향.

 






지경재 마루금에는 김철선생 숭모비가 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 김철 선생은

김철(金澈,1886.10.15-1934.6.29)
본관 : 영동
호 : 일강(一江)
이명 : 중청(重淸),영택(永澤)
활동분야 : 독립운동
1. 일생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609번지에서 부친 김동진과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서 4남 1녀중 3남으로 출생하여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그는 신학문을 배워야 극일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영광에 있는 광흥중학교에서 중학과정을 이수하고,1909년 서울에서 법률전수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1915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고향에 와서 제일 처음 한 일은 형제들과 상의해 노속들에게 토지 일부를 떼어주고 집으로 돌려 보내는 것이었다.

1917년 2월 나라를 잃은 설음에 분노하여 구국의 일념으로 중국상해로 망명하였다.

1918.8.20. 중국상해 프랑스조계 백미로 25호에서 여운형,장덕수,김철,조동호,선우혁,한진교등 6명이 발기인이 되어 신한청년당을 창당하였다.

신한청년당 부주무로서 기관지 신한청년을 발간 독립정신을 고취하였으며 대한적십자회의 상의원도 역임하였다.

1918년 11월 중국상해에서 미국대통령 윌슨의 특사 크레인을 초청하여 만찬회를 열어 만찬회석상에서 여운영, 김철, 장덕수, 신국권등이 만나서 자주독립을 요청하는 의견을 교환하고 윌슨에게 보내는 대한의 자주독립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전달하였다.

1919년 1월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각국에 독립을 선언함과 동시에 서병호, 선우혁과 같이 국내에 밀입국하여 자신의 전답을 정리하여 독립자금 1만원을 마련하여 상해로 가져가 독립운동 동지들의 생활을 원활하게 하였으며,상해로 가는 길에 서울에서 손병희 선생을 만나 3만원의 독립자금 지원을 언약 받고, 3.1만세운동 거사를 계획모의하고 동년 2월 상해로 건너갔다.

1919년 4월 10일 제1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의정원의원(전라도 대표)에 선임되었고,같은 달 제2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임시정부 재무위원겸 법무위원이 되었다.같은해 8월에 임시정부 교통부차장에 임명되었는데, 총장 문창범이 취임하지 않아 총장직까지 겸하게 되었다.1920년 1월에 그는 김구 등과 같이 의용단(義勇團)을 발기해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고 의용단 산하 선전위원회가 조직되자 위원장 안창호를 도와 선전업무에 종사하였다.

그러던중 임시의정원과는 별도로 안창호 등이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그결과 양자간에 갈등이 일어났다.

기야 1922년 7월에는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가 만들어 지고 김철은 시사책진회 회원으로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회의간의 갈등 조정에 들어가 양자간의 갈등은 진정국면에 들어섰다.

국민대표회의는 규정을 만들어 공포한다.

이런 활약이 높이 평가되어 그는 1924년 5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원 회계검사원 검사장에 임명되었다.

1926년 12월 김구(국무령)내각 국무위원에 임명되었고, 1927년 8월 이동녕 내각 군무부장에 임명되었다.

1930년 12월 새 헌법에 의하여 임기가 만료 제2차 내각구성에서 군무부장에 재임명되었고,1931년 10월 도산 안창호 선생과 함께 교민단(僑民團)심판이 되어 상해교민의 복지향상에 전념하였다.

같은해 11월 중국인과 공동항일전선을 형성하여 한중항일대동맹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조소앙과 중국인 오징천,서천방 등과 함께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1월 상해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의 정치위원으로 선출되고,같은 해 11월 국무위원에 임명되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사의 일황 저격사건과 동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중국 홍구공원에서의 백천대장 등 일본인 폭살 양대 의거를 당시 군무장으로서 백범 김구 선생과 같이 주도하였다. 이 사건 이후 일경의 추격이 급박해지자 상해에 있는그의 친지인 피치목사의 집 2층에 백범과 같이 피신해 있었다.

같은해 5월 상해임시정부를 항주로 이동하여 선생의 숙소인 항주시 소재 청태(淸泰)제2여사(二旅社)32호실에 임시정부판공처(臨時政府判公處)를 설치하여 임시정부 항주시대를 개막하였다. 동년 5월 16일 항주에서 첫 국무회의에서 선생은 재무장 에 김구선생은 군무장에 임명되었다.

1933년 7월 임시의정원의원에 선임되어 자격심사위원으로 신도의원의 자격을 심사하였다.

1934년 1월 3일 제3차내각(주석 양기탁) 무임소장에 임명되었다.

같은해 4월 2일 국무원비서장에 선출되어 임시정부의 이동에 따라 각지를 전전하면서 오로지 조국광복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한때 김구와 맞선 조소앙(趙素昻)과 제휴하였다. 한국독립당 14인 이사 중 한 사람으로 활약한 바 있다.


2. 일생 마침
1934년 6월 29일 중국 항주(杭州)소재 광자병원에서 격무에 시달려 몸이 쇠진하여 급성폐염으로 일생을 마감하였다.

이시영, 조완구, 송병조, 양기탁 등 임정요인들의 애도속에 악비묘(岳飛廟) 뒷산에 안장되었다. 당시 조산원이던 부인 최혜순(崔惠淳)여사와 사이에 미경, 혜경 등 두딸을 두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이틀째 산행 날머리인 함평생태공원에 도착하여 시설좋은 화장실에서 몸단장을 하고 작은 집을 짓고 만찬으로 오늘하루 수고한 피로를 푼다.




그런데 멀쩡하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뭐 이러다 말겠지 했는데 밤새 그칠줄 모르고 꾸준히 내린다.

내일 산행은 오늘보다 3km이상 길고 험로가 더 많다는데.

새벽세시가 되여도 별로 변함이 없어서 일찌감치 내일산행은 포기하고 잠이나 퍼질러 자보기로 한다.

아침 8시에 일어나니 비는 그쳤지만 풀잎에 맺어있는 빛물을 헤치고 나갈수도 없고 소슬바람님 컨디션도 안좋은데 잘됐다고 생각하고 주변을 둘러보고 텐트도 말리고 느긋하게 출발하여 집으로 일찌감치 돌아온다. 


함평생태공원을 구석구석 둘러본다.


























23번국도 영광방향


23번국도 함평방향


23번국도는 육교로 건너간다.

이 길이 영산기맥 마루금이다.



자동차.경운기.오토바이.자전거 등등 온갖 기계부품 쓰레기를 조합해서 만들어 놓은 모형들
















소요경비

이동거리=728km(왕복)

유류비=63.100원(연비15km/디젤1.300원)

톨비=갈때 13.850원/올때 없음.

등=20.000원

합계96.950원



이승재 (아득히 먼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