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기맥
부뜰이와 천왕봉이 걸어온 금강기맥
기맥길45.5(접속0.6/이탈)km/25시간7분
산행일=2019년10월5일
산행지=금강기맥 2구간(완주/천안)
산행경로=말골재=>장재봉 갈림길=>수재=>370봉=>남당산=>445.5봉=>밤아니재=>380봉=>360봉=>360봉=>작봉산(419.6m)=>260봉=>380봉=>까치울재=>420봉=>까치봉(456m)=>400봉=>380봉=>280봉=>말목재=>석천교회=>450봉=>옥녀봉(411.7m)=>범허리재(63번송전탑)=>함박봉(403m)=>함박재=>소룡고개=>371.3봉=>고내곡재=>350봉=>350봉=>누항재=>공원묘지=>천호산(501m)=>갈매봉=>문드러미재
거리 및 소요시간=27.2km/14시간19분
올 가을에는 유난히도 태풍이 한반도에 자주온다.
이번 주말에도 예정된 산행지인 강원도 양구지방에 태풍 미탁이란 넘이 온다구하여 일기예보를 주시 하는데 다행이 하루전날 양구는 피해 가겠지만 비가 내릴거라 하니 양구에 성골지맥이나 도솔지맥은 포기하고 첯 한구간만 진행하고 중단한 금강기맥을 이여 볼 생각으로 전북 완주지방에 일기예보을 살펴보니 구름은 많겠지만 비는 안올거란 예보이다.
이렇게해서 거의 5개월동안 중단된 금강기맥을 이여보고자 금욜 저녁 7시반이 조금넘은 시간에 인천을 출발하여 산행중 중간지점인 말목재를 경유하여 풀숲에다 물 1.5리터와 0.5리터짜리 캔맥주 하나를 숨겨두고 들머리인 말골재에 도착하니 11시가 막 넘어가는 시간이다.
새벽 4시 전후로 산행을 시작할 생각으로 3시에 알람을 마추고 천왕봉이는 뒷좌석에서 나는 조수석에서 쉬는 시간을 갖는다.
요란한 알람소리에 잠이깨고 집에서 준비해간 된장국을 데워서 밥을 한술씩 말아먹고 산행을 시작한다.
오늘 들머리인 말골재에는 그 흔한 도로표지판도 하나없다.
유일하게 인증할 만한 것이라곤 이것이 유일한 증표이다.
말골재(馬骨峙)는 전북 완주군 운주면과 경천면의 경계능선에 있는 고개로 17번 국도가 넘어가는 고개이다.
천왕봉이를 모델로 인증을 하고
완주경찰서 입간판 앞쪽에 있는 임도길로 20여미터 들어가 바로 우측으로 치고 올라간다.
서서히 가팔라지던 히미한길은 20여분 올려치니 길은 보이지도 않고 커다란 바위가 앞을 막아선다.
아차하는 순간이면 큰 사고로 이여질 수 있는 곳이라 조심조심 올라서니 지맥길은 좌측으로 90도 이상으로 꺽어지고 직진으로는 맥길에서 600여미터 벗어나 있는 장재봉으로 가는 길이다.
여기까지 0.86km인데 50분이나 소요 되였다.
갈길도 멀고 깜깜한 밤에 뭐가 보이겠냐 싶어서 장재봉은 페스한다.
장재봉 갈림길에서 40여분동안 가파르게 한껏 고도를 낮추면 근사한 이정표가 서있는 수재에 내려선다.
번듯한 이정표까지 설치해 두었지만 좌우을 살펴보니 사람이 다닌 흔적은 보이지도 않는다.
수재(秀峙)는 전북 완주군 운주면과 충남 논산시 양촌리 임화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빼재라고도 한다.
옛날에는 이곳에 소나무가 빽빽하게 많았고 골짜기의 깊이가 8km나 되여 재를 빠져나가는데 너무 힘이들어 빼재라고 불럿다고 한다.
이곳 부터는 지난구간 싸리재에서 같이해온 완주군 운주면은 끝나고 좌측으로는 완주군 화산면이고 우측은 충남 논산시 양촌면으로 충남과 전북의 도계의 경계능선이 이여진다.
오늘은 낮이고 밤이고 하루종일 거미줄과의 싸움이 끈이질 않는다.
수재에서 몇개의 무명봉을 넘고 올라서니 376m인 남당산인데
여기가 남당산 이라는 표시는 없고 선답자들의 리본 몇개가 여기가 남당산임을 알린다.
남당산(376m)은 완주군 화산면과 논산시 양촌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양촌면 고산리 상고마을의 남쪽에 있는 산이라하여 남당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논산시 양촌면 쪽으로는 울창한 숲이고 좌측인 완주군 화산면 쪽은 벌목을하고 어린 편백나무가 심어져 있다.
지난주에 미탁이 휩쓸고 간 흔적으로 아름들이 소나무가 꺽어져 있고 대강대강 톱질을 해놓아서 지나기가 여간 불편한게 아니다.
산행을 시작한지도 3시간이 지났고 배도 출출하여 빵 한개씩으로 간식을 먹는다.
남당산에서 내려서니 재의 흔적이 보이고 지도에서 확인을하니 여기 위치가 밤아니재 이다.
밤아니재는 전북 완주군 화산면과 논산시 양촌면을 잇는 고개로 고개가 하도 험하여 낮이나 밤이나 통행이 힘들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밤아니재에서 인증
밤아니재에 있는 이정표
우리는 장재봉.남당산 쪽에서 왔고 지맥길은 쌍계사 방향으로 진행된다.
쌍계사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만나고 여기 위치에서는 가야곡.삼전리.작봉산 방향으로 내려선다.
등로는 잘 정비되여 있는데
이런곳에 등산객이 올리도 만무하고
실제로 사람이 다닌 흔적은 보이지 안는다.
남당산에서 잘 정비된 등로을 내려서면 묘지를 하나 만나고 묘지로 올라오는 임도로 잠시 내려가면 임도는 좌측으로 돌아가고 지맥길은 우측 산길로 들어선다.
작봉산 오름 중에 쌍계사 갈림길을 두어번 지나고
봉우리에 올라서니 또다시 쌍계사 갈림길이고 작봉산이 05km라고 안내한다.
작봉산(鵲峰山)은 완주군 화산면과 논산시 경촌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예전에 이 봉우리에 까치가 많이 살아서 까치 작(鵲)자에 봉우리 봉(峰)을 써서 작봉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런데 잠시후에 까치봉이 또 나온다.
산 정상에는 중산리 숲길 안내도가 있고 3등 삼각점이 있다.
또 다른 이름으로는 불명산이라 불럿다고 한다.
작봉산의 3등 삼각점
그리고 작봉산 등산 안내도와 쌍계사의 유래가적인 안내판이 있다.
사진을 클릭해서 원본으로 보면 쉽게 볼수 있다.
작봉산에서 천왕봉이을 모델로 인증을 하고
작봉산을 지나면서 등로는 좋아진다
작봉산에서 40여분 후 어느 무명봉을 사면으로 돌아가는데.
사진이나 그림으로만 보던 버섯을 만나는데 순간적으로 능이버섯 이란걸 알았다.
능이 버섯은 1능이. 2송이라 하여 식용버섯 중에서는 송이버섯 보다도 으뜸으로 쳐주는 아주 귀하고 특급 버섯이라고 한다.
현 시세로 1kg당 16만원에 거래된다구 한다.
내가 쓰는 카메라 무게가 700g인데.
카메라보다 약간 가벼운듯 했으니 500g 이상은 되는거 같았다.
보물을 획득 했으니 한참동안 발걸음이 가벼워 진다.
갑자기 허기가 진다구 하여 과일 한쪽씩 먹으며 쉬여간다.
움푹 들어간 내림길 삼거리가 나오면 지도상에 까치울재
까치울재는 완주군 화산면 작동마을에서 논산시 양촌면 중산리 우왕마을을 넘나들던 고개이며 옛날에 도적들이 진을치고 있었다고 한다.
6.25때는 공비들의 은신처이기도 하였다고 하며 지금은 오랜 세월동안 사람의 발길이 없다보니 자세히 보지 않으면 고개의 흔적은 알수 없을 정도이다.
까치울재에 있는 이정표
까치울재에서 한봉우리 올라서면 여기가 까치봉.
까치봉(546m)은 완주군 화산면과 논산시 가야곡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멀리서 보면 산봉우리가 까치집 처럼 보인다고 해서 부른 이름이라고 한다.
까치봉을 지나고
원래는 말목재에서 어잿밤에 숨겨둔 물을 회수해서 석천교회에서 아침을 먹을 계획 이였는데 천왕봉이가 허기가 져서 갈 수가 없다고 하여 여기서 아침을 먹는다.
한시간이면 충분히 말목재까지 갈수 있을거 같은데....
까치봉에서 아침을 먹고 좌측으로 희미한 길을 따라 내려가는데 군이님 리본이 땅바닥에 딩굴고 있어서 회수하여 조금 진행후 우측으로 꺽어지는 위치에 걸어준다.
갑자기 절개지가 나오고 우측으로 돌아서 내려가는데 밤나무 단지이고 미쳐 수확을 못 했는지 바닥에는 주먹만한 알밤들이 그냥 썩어가고 있다.
어잿밤에 물을 숨겨둔 말목재
말목재는 643번 지방도로가 넘는 고개로 전북 완주군 화산면과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삼전리를 잇는 고개로 고개의 형상이 말의 목처럼 생겼다고 해서 말목재라 부르기도 하고 전라북도를 향하는 끝 길의 막다른 길목이라 하여 말목재라는 지명이 되였다고 한다.
말목재에서 도로를 건너면 우사 안쪽으로 석천교회가 있고
석천교회 종각뒤에 산으로 올라가는 철사다리가 바닥에 깔려있다.
우사에는 튼실한 한우들이 우글우글.
교회는 페업을 했는지 우째 갈끔해 보이질 않는다.
바닥에 깔려 있는 철 사다리로 올라간다
마루금에 올라서면 우측으로 벌목을하여 편백나무가 식재되여 있고 삼전리 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우리가 지나온 마루금을 돌아보고
이름이 뭔지는 모르지만 이런 열매가 군데군데 엄청 많이 열려있다.
벌목지가 끝나면 이슬을 잔뜩 머금은 잡목에 고무줄같은 거미줄에 더딘 산행이 진행된다.
하루종일 희뿌연 안개로 잡목과 풀숲에 맺혀있는 이슬로 우중산행 처럼 옷이 젓고 찐덕찐덕한 거미줄로 도저히 속도가 나질 않는다.
지도상 450봉에 올라서니 앞쪽으로 함박봉과 천호산이 조망되고 옥녀봉이 내려다 보인다,
그 와중에 좌측으로 조망이 열리고 석천리와 춘산리 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엄청난 잡목길은 계속되고 옥녀봉이 0.16km 지났다고?
450봉을 옥녀봉으로 가리키는거 같다.
지도에는 약 500m 앞쪽에 있는 걸로 되여있는데.
이정표에서 가리키는 삼전리 방향을 보니 길이 보이질 않는다.
예전에는 길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사람은 고사하고 짐승도 지나갈 수 없을 정도다.
좌측으로 내려다 보이는 춘산리
논산465번 삼각점이 있는 이곳이 지도상에 옥녀봉.
옥녀봉(玉女峰:411.7m)은 완주군 화산면과 논산시 가야곡면 경계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봉우리가 예쁜 여자처럼 생겼다고 해서 옥녀봉이란 이름을 붙였다는데 내 보기엔 아무리 보아도 그리 보이질 않는다.
옥녀봉을 지나면서 등로는 차츰 좋아진다.
63번 송전탑을 만나면
여기가 범허리재.
범허리재는 동박골에서 지내기재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의 모양이 범의 허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우측은 논산시 가야곡면에서 연무읍으로 행정구역이 바뀌는 곳이다.
범허리재는 좌우가 이렇게 칙넝쿨로 뒤덥여 있어서 고개의 흔적은 보이지도 않는다.
범허리재에서 한봉우리 치고 오르니 근처에 사격장이 있는지 박격포 피탄지역이니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판이 수시로 나온다
사격이 있는 날에나 올린다는 붉은 깃발은 사격이 없는 주말임에도 펄럭이고 있다.
쓰다 남았으면 되가져 가서 잘 둿다가 필요할 때 쓰던가 해야지 지돈으로 산거 아니라구 이러면 안되지.
군사지역이라 그런지 함박봉까지 잘 정비된 길을 걷는다.
함박봉은 충남 논산시 연무읍 소룡리와 전북 완주군 화산면 운산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논산훈련소 뒷편에 있는 산이며 산봉우리가 작약꽃처럼 이쁘다고 해서 함박봉이라 부른다고 하는데 군 훈련소가 있는 곳이라 우리같은 지맥꾼이 아니면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곳이고 이름같이 이쁜산은 아니다.
함박봉에서 내림길은 히미하긴 하지만 부드럽고 편한길이 이여진다.
갑자기 절개지가 나오면 좌측으로 가파르게 내려가는데
칙넝쿨이 얼마나 무성한지 넘어져 굴러 미끄러져도 다칠일도 없겠다.
칙넝쿨이 무성한 절개지를 내려서면 여기가 소룡고개이다.
소룡고개(巢龍峙)는 완주군 화산면 운산리와 충남 논산시 연무읍 소룡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15번 군도가 넘어가는 고개이다.
소룡리(巢龍里)는 옛날에 이무기가 집을 짓고 반용이 되여 천운을 기다렸다가 승천 했다는 용골이 있어 소룡골이라 부르다가 1914년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양지리(陽地里) 일부을 병합 개칭하였는데 소룡고개는 소룡리에 인접한 고개라 그냥 소룡고개(巢龍峙)라 부르게 되였다.
도로를 횡단하면 좌측으로 임도가 돌아가고 지맥길은 우측 능선으로 올라간다.
소룡고개에서 논산시 연무읍 방향
완주군 화산면 방향
소룡고개에서 히미하긴 하지만 예전에는 관리가 잘 되였는지 곳곳에 벤취의 흔적도 보이고 그런데로 편한길을 10여분 올라가니 성터의 흔적이 보이는 성태봉이다.
이곳은 예전에 백제의 고성(古城)으로 알려진 곳으로 백제 8대 고종왕의 셋째딸인 매화공주가 있었는데 이 공주는 문무(文武)가 출중하고 지혜도 남달랏다 하며 신라와 전쟁을 할때 신라를 방해하기위해 용장을 인솔하고 이곳에 와서 성을 쌓고 대기한 곳이라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성태봉에는 사각 정자가 있는데 얼마나 낡았는지 곧 무너지게 생겼다.
성태봉(城太峰:371.3m)은 완주군 화산면과 논산시 연무읍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옛 성의 흔적이 남아서 성태봉이라 부르고 성태봉 서쪽 황하리 사람들은 윗대의 어른들로 부터 이 성이 삼국시대에 백제의 고성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정상은 묵은 헬기장이고 몇미터 아랫쪽에는 연고가 없는 묘지인지 오랫동안 관리가 안된 묘지가 한기 있고. 산행지도에는 삼각점이 표기되여 있는데 엄청남 잡풀로 인해서 한참동안 수색을 했지만 삼각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성태봉에서 내림길은 묘지로 올라오는 임도길이고
몇분 진행하면 임도는 좌측으로 돌아가는 위치에서 우측 산길로 올라선다.
성태봉에서 한 봉우리 올랏다 내려서면 고개의 흔적이 보이는데
지도에서는 정확한 지명이 없다.
위치는 조금 앞쪽에 고내곡재라는 고개가 있는데.
여기가 원래 고내곡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우측으로 연무읍 고내리 방향
좌측으로 운산리 방향
지명을 알수 없는 곳에서 5분후에 절개지가 나오면 새로 확정하여 포장을 한 고내곡재이다.
어느 쪽으로 내려가야 할지 모르고 주위를 왔다갔다 하는데
우측에 군이님 리본이 살랑거리며 이쪽으로 오라구 길 안내을 한다
절개지 끝을 바라보며 내려가는데 막상 가보니 내려설 수가 없을 정도의 높이라 우측으로 계속 돌아가니 묘지로 올라오는 돌계단이 있다.
절개지에서 바라본 논산
삼국시대에는 황산벌로 불리던 곳이고 백제의 명장 계백과 신라 김유신 장군과의 큰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황산(黃山)벌 전투란. 660년에 황산벌에서 있었던 백제군과 신라군의 큰 싸움을 말한다.
마지막 전투을 앞두고 처자식을 희생시킨 계백의 결사항전 백제의 명장 계백은 마지막 전투임을 직감하고 결전을 위해 처자식을 손수 희생시키고 5천명의 소규모 병사를 이끌고 전장에 나선다.
이에 맞서는 신라 김유신 장군의 병력은 5만명.누가봐도 전쟁의 승패는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였다.
그러나 국운이 걸린 백제의 항전은 놀라웠다.
신라의 5만대군을 맞아 4전 전승을 거둔것이다.
발이묶인 신라는 초조해 질수 밖에 없었고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게 된다.
계속하여 잔 신라군의 사기를 높이는 방법이 필요했는데.바로 화랑 관창이 그 역활을 맡게 된다.
16세 화랑 관창이 나서 백제군의 진영으로 향한다.
창 하나로 적진 한가운데에 뛰여든 관창.그 용기를 높이 산 계백이 관창을 살려 보내지만.그는 또다시 적진으로 뛰여들어 목숨을 잃는다.
말의 안장에 매달려 돌아 온 관창의 목.참혹한 어린 화랑의 죽음앞에 신라군은 투지를 불태우고 결국 백제군은 전멸당하고 만다.
백제는 황산벌전투 후 열흘 만에 700년 역사의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