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지맥
부뜰이와 천왕봉이 걸어온 영월지맥
지맥길96.3km(접속/이탈8.8km)/54시간8분
산행일=2018년7월29일
산행지=영월지맥 9구간(영월/단양)
산행경로=(해고개=>442봉=>495봉=>관암당고개.지난 미 구간 보충)=>관암당고개=>이동통신탑=>450.8봉=>국지산(626)=>조전고개=>606.8봉=>포장도로=>흥교갈림길=>1022봉=>흥교갈림길=>달골갈림길=>태화산(1027)=>큰골갈림길=>1025봉(전망대)=>전망대=>905봉H=>915봉=>715봉=>711봉=>620.8봉=>각동리(남한강)
거리 및 소요시간=21.7km/11시간9분
장마가 시작되는 듯 하더니 비가 오는둥 마는둥 은근슬쩍 조기에 물러나 버리고 연일 기록을 갱신하며 폭염이 치솟는다.
1110년만의 기록이라니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체험하는 중이다.
진행중인 영월지맥. 앞구간에서 무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4km를 남기고 포기한 짜투리를 어떻게 할것인가. 논의 끝에 조금이라도 덜 더운 시간에 진행하고자 무박산행으로 하기로 한다.
결과적으로는 아주 잘한 결론이였다.
당일 산행으로 진행 했더라면 지난주와 같은 일이 발생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일이다.
오늘이 영월지맥 마지막 구간임에도 지난주 보다도 적은 인원으로 출발한다.
나야 처음부터 참가한 것도 아니고 전 구간 완주을 한 것도 아니지만 이 모든것이 처음 경험하는 폭염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지난주에 무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산행을 포기한 지점에서 약200m정도 지난 해고개에 새벽 두시가 안되서 도착하고 인증사진 한장 남기고 곧바로 산행을 시작한다.
해고개(日峴:해발330m)는 충북 단양군 영춘면 유암리와 사이곡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 59번 국도가 지나는 곳으로 이 지역 사람들은 해현(日峴) 또는 갈고개라 부른다.
지명의 유래는 지대가 높아서 해 뜨는 것을 제일 먼저 본다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새벽 1시58분 산행을 하고자 이자리에 섯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단히 미친 사람들이다.
그렇거나 말거나 우리들은 이순간이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다.
맑은 하늘에 보름달이 어찌나 밝은지 숲속에서 보일때는 산중턱에 왠 가로등인가 착각을 해서 여러 사람들이 폭소를 터트렸고.
어느 한분은 해가 뜬다고 해서 또 한번 웃었다.
그렇게 495봉을 넘고 상수도 물탱크를 지나고 대단한 잡목을 헤치고 내려서니 임도길이 나온다.
임도길에서 우축으로 방향을 잡고 몇분 내려 가다가 좌측에 폐가(廢
그냥 쑤시고 들어간다.
그렇게 몇분 고생하니 히미한 길이 보이고 한두번 자동차 소리가 들리니 관암당고개가 멀지안았음을 직감으로 알 수 있다.
그렇게 도로에 내려서면 여기 가까지가 지난주에 진행을 못한 4km 관암당고개이다.
관암당고개에는 조전리라는 표지석이 있다.
관음당재(觀音堂峙:해발352m)는 영월군 남면 연당리 승당(昇堂)에서 조전리((助田里.진밭)의 상촌으로 넘어가는 험한 고개로 영월에서 충북 단양군 춘양면으로 통하는 2차선 도로가 지나가며 고개 정상에 조전리 라는 표시석이 서 있는 조그만 소공원이 자리 잡고있는 고개이다
고려 인종의 아들인 충희(沖曦)대사가 태화산 서쪽의 흥교사에 있을 때, 그 절에 봉안할 부처님(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이 고개에서 쉬었다가 넘어갔다 하여 관음당재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이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산마루에 당(堂)을 세웠는데, 지금도 관음당재로 오르는 당마루 밑의 마을을 오를 승(昇)자와 집 당(堂)자를 써서 승당.신댕이.신댈 이라고 부른다.
관암당고개에서 10여분쉬는 시간을 갖는다.
관음당고개에서 35분 진행하여 삼각점이 있는 450.8봉에 올라서는데.봉우리 같지도 않고 밋밋한 곳에 삼각점이 보여서 450.8봉이란 것을 알앗는데. 여기 위치가 요술을 부리는지 참여자 모두가 알바을 하고 있다는 것을 한참만에 깨닫는다.
그것도 엉뚱한 곳으로 가는게 아니고 왔던길을 되돌아가고 있었으니 원.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마루금에서 어느정도 벗어나면 gps에서 경고음이 울리는데. 경고음이 없었다는 것은 범위내에서 벗어나지도 않았다는 애기다.
오늘 날씨도 지난주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거 같고 산행을 시작한지 세시간 반이 지났는데, 바람한점이 없다.
앞에 국지산이 보일때쯤 날도 밝아지고 배도 고파온다.
무슨 이정표가 이런가? 무슨 지명을 표기해야지 막연히 버스정류장이라 하면 이동네 토백이가 아니구서야 어느누가 알 수 있을까.
산행지형도에서 보면 아래쪽에 영월군 남면 광천리를 가리키는거 같다.
해고개에서 산행을 시작한지 4시간만에 국지산에 올라서는데 8.1km지점이다..
국지산(菊芝山:해발625.6m)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과 남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조선조 제 6대 임금인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 5km 전방에 솟아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3등 삼각점이 있다. 산의 지세가 고구마처럼 길게 자리를 잡고있고 산 아래에 국화처럼 생긴 국지골이 있어서 붙혀진 지명으로 영월읍의 진산인 태화산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산으로 산세가 유순하고 부드러워 산행지로는 최적의 산이다.
국지산에서 아침식사을 하며 쉬는 시간을 갖는다.
식사후 몇몇은 그냥 출발하고 국지산 인중후 출발한다.
다녀간 선답자들의 표지기도 살펴보고 우리 것도 하나 달아준다.
국지산에서 1분쯤 진행하면 조망바위가 있고 진행방향 쪽인 동쪽은 오늘 구간에 최고봉인 태화산이 보이지만 잡목으로 카메라에 잡을 수는 없고 좌측인 북쪽을 바라보면 영월읍을 감싸고 있는 봉래산과 계족산이 보이고 그 사이로 완택산과 고고산이 보이며 두위지맥인 계족산과 응봉산, 만경대산이 긴 능선을 이어가고 있다.
남동쪽 흥월리 건너 태화산의 모습이 보이고 신선봉, 국망봉, 비로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소백산 주능선의 모습이 아련히 보이기도 한다.
조망바위에서 급내리막 길을 내려서면 좌측으로 태화산이 올려다 보이고 조금더 내려가면 겨우 흔적만 남아 있는 조전고개이다.
조전고개(助峙.해473m)는 영월군 영월읍 흥월리에서 남면 조전리를 넘어가는 고개이며 조전리에서 영월읍내로 들어가는 관문 역활을 하는 고개로 이곳에 문(門)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문고개라고 부르는 곳인데. 지도상에서 이 고개 부락의 지명을 따서 조전고개라고 부른다.민초(民草)들이 걸엇던 히미한 능선과 성황당의 흔적같은 돌무덤이 있다.
조전고개에서 30여분 진행하면 삼각점이 있는 606.8봉에 올라선다.
606.8봉의 삼각점.
606.8봉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는데. 우측으로는 최근에 설치한 듯한 촐조망이 쳐져있다.
지하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땅이 내려앉은 곳이 여러군데가 보인다.
산행중에 내가 서 있는 곳이 갑자기 이렇게 땅이 꺼져버리면 얼마나 놀랏까.
이런것이 여러군데에 있었다.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봉 직전에서 좌측으로 임도길이 보여서 임도길로 내려선다.
마루금으로 간들 얼마 가지않아 도로에 내려설 것이므로 조금 편하자고 임도길로 진행한다.
임도길을 16분 걸으니 포장도로가 나오고 삼거리이다.
여기 위치가 지도상에 흥교재이다.
흥교재는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흥월리와 충북 단양군 영춘면 사지원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Y자형 삼거리로 고개에는 흥교재 나그네 쉼터 라는 사각정자 가 있다.
이곳 우측 아래에 흥교리(행정지명 흥월리) 흰깃마을 있어서 흰깃재라고도 부른다
흥교재에 사각정.
나그네쉼터 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마루금에는 길도 없을 뿐더러 낙석방지용 철망으로 올라갈 수도 없다.
흥교마을 입구에 있는 안내문. 그대로 옴겨보면 아래와 같다.
영월의 흥교사(興敎寺)를 신라 때는 세달사(世達寺)라 했는데, 후고구려를 세운 신라 47대 헌안왕의 아들인 궁예(弓裔)가 이곳에서 중이 되었다고 (삼국사기열전(列傳)에 기록되어 있다.
(弓裔 便去世達寺 之興敎寺是也 祝髮爲僧自號善宗 궁예는 세달사로 갔으니, 지금의 흥교사가 있는 곳이다. 머리를 깎고 승려가되어 스스로 이름을 선종이라 하였다)
또한 흥교사가 세달사임을 밝혀주는 내용이 삼국유사 卷三에 있다.
(昔新羅爲京帥時 有世達寺(今興敎寺也)之莊舍 在溟州奈 李郡 按地理志 溟州無奈李郡唯有柰城郡 本奈生郡 今寧越 옛날 서라벌이 서울이었을 때. 세달사(지금의 흥교사)의 莊舍(농장)가 명주 내리군에 있었다. 지리에 의하면 명주에 내리군은 없고 다만 내성군이 있었는데 본래는 내성군으로 지금의 영월이다)
그후, 궁예는 환속하여 892년에 원주의 도적 양길(梁吉)의 부하가 되어 치악산의 석남사(石南寺)를 중심으로 진(陳)을 치고 내성(奈城,영월),주천(酒泉),울오(鬱烏,평창),어진(御珍,진부)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다.
주천에 있는 법흥산성, 도원산성 그리고 북면의 공기산성이 그 당시에 쌓았던 성(城)으로 추정된다
흥교사는 아홉 개의 암자를 가지고 있었고 공양미를 씻을 때는 뿌연 쌀뜨물이 영춘의 군관 모랭이까지 흘러갈 정도로 큰 절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스님들의 부패가 심해져, 돈 많은 상인들이 물건을 팔러오면 돈과 물건을 빼앗은 뒤 마을 뒤에 있는 사굿구덩이에 처박아 죽였다고 한다.
그후부터 이곳 흥교사는 빈대가 많이 꼬여서 결국은 절에다가 불을 질렀는데 절집이 보름간을 탔다는 얘기가 전하고 있으며 얼마전 객토를 위해 땅을 팔 때 절터에 타다 남은 기둥과 숯이 나왔었고 그 절터인 흥교분교 운동장에서 1984년 높이가 6.5cm, 둘레가 2.5cm인 석가여래입상이 발굴되어 문화재관리국에서 보관하고 있다.
또한 흥교사의 규모가 크고 화려했음을 알 수 잇는 것은 이곳 절터에서 영월 지방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개와(蓋瓦)가 발견되었는데, 불교의 상징인 연꽃 무늬가 새겨진 수막새와 귀면와(鬼面瓦), 그리고 용 두 마리가 좌우에 서로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고 테두리에는 구슬 띠무늬(蓮侏文)가 그려진 암막새(암키와 끝에 드림새를 붙이는 개와)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는 부도나 고려 청자 파편, 석탑조각들이 그 흔적을 남긴 채 널려있다.
이제 8시가 막 넘어가는 아침 시간임에도 머리위로 내리쬐는 열기는 숨이 막힐지경이다.
지금은 몇가구 되지않는 흥교마을이 보인다.
길목에 마음씨 좋은 어르신께 허락을 받고 시원한 물로 달아오른 열기를 식혀본다.
민가 옆에는 세달 약수터도 있다.
지맥꾼들 식수 보충하기엔 최적의 위치이다.
물맛 또한 기가 막히도록 시원하다.
흥교태화농장 건물을 돌아서 올라가고 마지막 민가에서 우측으로 붙으면 지맥마루금에 닫는다.
태화산 오름중에 지난구간 부터 지나온 지맥길이 헌히 내려다 보이는데 카메라로 잡을 수 없음이 아쉽다.
삼거리가 나오고 우리는 흥교쪽에서 올라왔고 태화산 쪽으로 진행한다.
흥교마을에서 400m의 고도를 높이며 올라 왔지만 국지산 이후로 쉼없이 불어주는 시원한 바람으로 크게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었다.
태화산(太華山:해발1,027m)은 강원도 영월군 남면 ·김삿갓면과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의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신증동국여지승)에는 대화산(大華山)이라는 기록이 있다.
영월 사람들은 화산이라고도 부른다.
강원도와 충청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서 산세는 대체로 완만한 편이며, 정상에서 북서쪽으로 뻗은 능선 끝에는 남한강이 U자형으로 곡류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군의 남쪽 16리에 있다.고 쓰고 있다.
(영월군읍지)에는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읍의 안산(案山)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영월부읍지)와 (여지도서)에는 부의 남서쪽 16리에 있다.
원주 사자산 동쪽으로부터 뻗어 나온 읍치의 안산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태화산에는 고려 시대의 돌과 흙의 혼합축성법으로 쌓은 태화산성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어느 집안에 남매 장수가 있었다.
그 어머니는 성(城) 쌓는 내기를 시켜서 이기는 자식을 키우기로 하였다.
아들인 왕검에게는 정양리에 돌성을 쌓게 하고 딸은 태화산의 흙성을 쌓게 했는데 어머니가 보니 딸이 아들보다 먼저 완성할 것 같으므로 흙성을 무너뜨리자 딸은 흙더미에 깔려 죽고 말았다. 그래서 왕검성은 지금도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으나 태화산성은 무너졌다는 전설이 이 지방에 전해 온다.
태화산에 올라서니 한무리의 산꾼들이 웅성거리는데. 흥교재에서 대형버스가 한대 올라가더니 그들인거 같고 심한 방언으로 바서 부산에서 올라온거 같다.
그들이 떠날때까지 우리도 쉬면서 체력보충을 한다.
태화산에는 보기드믄 2등삼각점이 있다.
태화산에서 지맥마루금은 고씨굴 방향으로 진행한다.
첯번째 조망처에서 남한강을 조망한다.
계속 고씨굴 쪽으로
두번째 조망처에서 u자로 흐르는 만한강이 내려다 보이고 영월지맥의 끝지점인 각동리도 눈에 들어온다.
세번째 조망처에서는 더욱 잘 보인다.
태화산성 갈림길이 나오고 고씨굴 쪽으로 진행한다.
태화산성을 알아보고 가자.
태화산성은 강원도 영월 태화산에 있는 토성(土城)으로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영월에 있는 대야성, 정양산성, 영춘산성과 동일한 시기(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으로 다른 산성들이 돌로 추조된 석성(石城)으로 실전에 사용된 반면, 4개 산성중에 가장 높은곳에 위치해 있었던 태화산성은 토성으로 적정을 감시하고 그 상황을 우군에게 전하는 사령탑 역할을 했던 산성으로 태화산 능선 해발 900m에 자리잡고 있으며 길이가 약 400m, 둘레가 1,200m의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으로 내무에 골짜기를 포용하고 있는 형태로 능선을 따라 축조한 산성이다.
최종 목적지가 고씨동굴 쪽은 아니지만 고씨동굴을 알고 가는게 좋겠다.
고씨동굴(高氏洞窟:천연기념물 제219호)은 고씨 조선시대의 선비 고종원으로 1538년5월에 태여났다.
1592년 일본이 한국으로 처들어와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고종경을 도와 식량과 무기를 모으고 일반 사람들을 모아서 일본군과 싸웠다.
하지만 일본군의 밀려 병사들이 도망가는 것을 막지 못하였으며 하여 동생은 사형을 당했다.
고종원은 일본군이 이 영월지역으로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을 데리고 지금 이 동굴속으로 피신을 하였는데 적이 동굴에 불을 지펴 산채로 잡으려고 하자 부인은 남편을 도망갈 수 있도록 해주려고 동굴 속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하였고 그 후 또 다른 아우 고종길과 함께 적군에 잡혀 있다가 탈출하였지만 아우는 적군에 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전쟁을 치르면서 부인과 두 아우를 잃은 고종원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인 1592년 4월 20일부터 9월 6일까지의 사건을 모두 기록하였다.
고종원의 가족이 동굴 속으로 피했다고 하여 이 굴을 고씨굴이라 부른다고 한다.
1969년 6월 4일 천연기념물 제219호로 지정되었으며 면적 48만 762m2, 길이 약 6km의 동굴로 약4억년 전부터 형성된 것이라고 하는데 굴 안에는 4개의 호수를 비롯하여 3개의 폭포, 10개의 광장 등이 있으며,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종유석, 석순, 석주들이 조화있게 배치되어 장관을 이룬다.
동굴 안의 기온은 항상 16도씨를 유지하며, 박쥐, 흰새우, 흰지네 등. 동굴동물이 서식하고 그 밖에 신속1, 신종7, 신아종7의 동물이 새로 판명되었다.
일반 태화산 등산로는 고씨굴 쪽으로 진행되고 지맥길은 방향표시가 없는 이정목 뒤로 내려간다.
고씨굴 갈림길을 버리고 지맥길로 내려서니 길은 점점 히미해지고 잡목과 잡풀을 헤치고 올라서니 4등삼각점이 있는 620.8봉에 올라선다,
620.8봉에서 거의 20분정도를 내려가는데.
어찌나 가파른지 내림길이 이렇게 힘들어 보기는 처음인거 같다.
후답자들께서는 겨울철에는 마지막 구간을 잘 조정해서 진행해야 될 것을 부탁드린다.
620.8봉에서 벌벌거리며 내려서니 좌우가 시원스럽게 조망이 트인다.
마지막으로 작은 봉을 하나 넘으니 임도길이 나타난다.
임도길에서 좌측으로 가야 하는데, 무심코 우측으로 진행하여 다시 되돌아와서 좌측으로 내려간다.
임도길로 진행중에 조망.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각동리. 지맥마루금에서는 약간 벗어난 위치이지만 마을회관앞에 각동마을 표지석에서 인증하는 것으로 영월지맥을 졸업한다.
앞에 미답사로 남은 세구간은 더위나 한풀 꺽인 다음에 진행할 예정이다.
김삿갓면에 왔으니 김삿갓을 대충이라도 알아보자.
김삿갓의 호는(蘭皐)였고 본명은 김병연(金炳淵)으로 조부모인 김익순(金益淳)은 당시 관직이 높은 선천 방어사로 그는 군비가 부족하고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음을 낙심하다가 날씨가 추워서 술을 마시고 취하여 자고 있던 중에 습격한 반란군에게 잡혀서 항복을 하게 되고. 이듬해에 반란이 평정되자 김익순은 사형을 당하게 된다.
그때 김익순이 데리고 있던 종복중 김성수(金聖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황해도 곡산에 있는 자기 집으로 병하.병연 형제를 피신시키고 글 공부도 시켜 주었으며 이후 조정의 벌은 멸종이 아닌 김익순 한 사람에게만 한하게 되여 김병언의 가족은 한양을 떠나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홀어머니 한평 이씨가 형제를 데리고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로 이주하게 되는데. 김병연이 김병연이 스무살이 되던 1826년(순조 32년). 영월군 영월읍내의 동헌 뜰. 백일장 대회에서 논정가산 충절사 탄김익순 죄통우천(論鄭嘉山 忠節死 嘆金益淳 罪通于天). 시제(詩題)로 김익순의 죄에 대하여 망군(忘君) 망친(忘親)의 벌로 만 번 죽어도 마땅하다고 추상같은 탄핵을 하여 장원을 하게 되는데. 난고가 이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날 모친이 그 동안 숨겨왔던 내력을 들려준다.
난고는 너무나 기막힌 사실과 고민 끝에 자신이 조부을 다시 죽인 천륜을 어긴 죄인이라고 스스로 단죄하고. 뛰여난 학식에도 불구하고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감과 폐문한 집안의 자손이라는 멸시로 인해 20세 무렵 ㅊ자식을 둔 체 방랑의 길을 시작하였고 이때부터 난고 김병연은 죄인의식으로 푸른 하늘을 바로 볼 수 없다 하여 삿갓에 죽장(竹杖)을 짚은 채 방랑생활을 시작 하였던 것이다.
금강산 유람으로 방랑의 생활을 시작하여 한양 함경도.강원도.황해도.충청도.경상도.전라도.평안도.제주도를 돌았으며 도산서원 아랫마을과 황해도 곡산 등지에서 몇 해 동안 훈장생활을 하였으며 전라도 동북땅에서 한 많은 삶을 마감하였다.
백일장 죽장(竹杖)을 짚은 채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난고 김병연은 원래 전라도 동북(지금의 전라도 화순군)에서 돌아 가셨지만 아버지를 찿아 전국을 떠돌던 둘째 아들 익균이 주거지인 김삿갓면 노루목 바로 이 곳 골짜기에 묻어 주엇으며 그의 묘소는 1982년 영월의 향토 사학자 정암 박영국선셩의 노력으로 처음으로 발견되였다.
漂浪一生嘆(표랑일 생탄)
鳥巢獸穴皆有居 顧我平生我自傷(조수수혈개유거 고아평생새아자상)
새도 집이 있고 짐승도 집이 있어 모두 거처가 있것만 거처도 없는 내 평생을 회고 해 보니芒鞋竹杖路千里 水性雲心家四方(망혜죽장로천리 수성운심가사방)
이내 마음 한 없이 서글프구나 짚신신고 죽장 짚고 가는 초라한 나의 인생여정 천리길 머나 먼데....
마지막으로 남한강으로 내려가 보자.
시원할 것으로 생각했던 물이 폭염을 이기지 못하고 미지그리 하다.
그래도 한참동안 몸을 담그고 있으니 달아오른 몸을 식히기엔 부족함이 없다.
흐르는 곡
Over The Valley and Mountain (산과 계곡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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