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지맥
부뜰이와 천왕이 걸어온 강화지맥
지맥길 19.2(접속/이탈)km/8시간9분
산행일=2020년10월4일
산행지=강화 섬 산줄기 1구간(강화도)
산행경로=강화대교=>당산돈대=>당산(堂山:74.2m)=>당고개=>강화청소년수련원=>강화여중학교=>견자산(見子山:60m=>현충탑=>강화산성 동문=>강화중학교=>강화산성 북문고개=>126봉=>진고개=>고려산(高麗山:436.3m)=>(고비고개/나레현)=>267.2삼각점봉 왕복=>혈구산(穴口山:460m)=>퇴모산(338.9m)=>강화군농업기술센타
거리 및 소요시간=19.2km/8시간9분
닷새의 긴 추석연휴에 아들내외 와 딸 내외 손자 손녀가 시끌법적 하다가 이러쿵 저러쿵해서 하루을 앞당겨서 간다니 애들은 세밤자고 가기로 했는데 두밤자고 간다고 투덜투덜 난리가 아니다.
우리는 하루가 남게 생겼는데 집에만 있을 수도 없고 진행중인 문수지맥을 가자니 너무멀고 가고오고 하다보면 월요일 출근하기도 빠듯할거 같아서 오래전부터 계획은 해놓고 지금까지 미루어 온 관악지맥이나 한구간 하자고 일기예보을 검색을 해보니 아침 6시부터 9시까지 비소식이 있다.
인천쪽인 강화도는 4시부터 6시까지 아주쬐끔 올거라는 예보이다.
이렇게해서 예정에 없던 강화 섬 산줄기(강화지맥)를 한구간하게 된다.
강화도(江華島)의 지역유래를 보면 강화라는 지명은 940년(태조 23)에 처음 등장한다.
이전에는 해구. 혈구 등으로 불리다가 이 때에 강화현으로 편제하였다.
강화는 강과 관련된 지명으로. 한강. 임진강. 예성강등의 여러 강을 끼고 있는 아랫고을’이라고 하여 강하라고 부르다가 강 아래의 아름다운 고을 이라는 뜻으로 강화라고 고쳐 불렀다.
강화도는 원래 김포반도의 일부였으나 오랜 침식작용으로 평탄화된 뒤 침강운동으로 육지에서 구릉성 섬으로 떨어져 나왔다.
섬의 남쪽에는 제일 높은 마니산(摩尼山:472.1m)이 있는데. 산꼭대기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참성단이 있다. 그 외에 중서부의 진강산(441m)과 중북부의 고려산(高麗山:436.3m) 등을 비롯하여 낙조봉(落潮峰:343m).혈구산(穴口山:460m).별립산(別立山:416m) 등 여러 산이 있으나 험준하지는 않다.
집에서 46분을 달려서 도착한 곳이 강화대교를 건너면 우측으로 있는 강화인삼센터휴게소에 도착한다
강화대교 방향으로 내려가면
해안 철책이 나오고 좌측으로 조금 이동하면
대형 화물트럭이 주차되여 있는 좀 어수선한 곳이 있다.
여기서 적당한 곳으로 올라간다
초입에는 좀 가파르게 올라가고
입구에 들어서자 마자 법광님이 길 안내를 한다.
조금더 올라가니 선생님께서도 이쪽으로 오르셨군요
20여분 만에 첯 산인 당산에 올라선다
당산의 삼각점은 김포 402
당산에서 살짝 내려섯다 올라서면 절개지가 나오고 강화대교가 내려다 보인다
강화대교 나들목 교차로가 보인다.
저리로 내려서야 하는데 절개지 가까이로는 잡목으로 불편하여 조금 후퇴해서 일반 등로로 내려간다.
군용삼각점이 있고
어느 주차장으로 내려서고
청소년 수련원 앞을 지나간다
여기 위치에서 도로를 건너서 진행했으면 좋았을 것을 직진을하는 바람에 조금 돌아서 더 걷게된다
주택.상가 거리를 30여분을 걸으면 강화여자중학교 앞을 지난다
도로는 좌측으로 꺽어지고 마루금은 직진으로 이여 진다
직진으로 들어가 보니 페가가 한체 있는데
산으로 올라갈만 한 곳이 않보여서 다시 후퇴한다
아랫쪽 주택 골목으로 들어가 본다.
아주 좋은 길이 있다
방화선이 나오고 강화 나들길이란 리본이 걸려있다
그런데 둔덕에 고목나는 어째서 한그루도 않남고 몽땅 다 죽었을까?
올라온길 돌아보니 숲 넘어로 강화 읍내가 내려다 보이고
견자산 정상에 올라서니 커다란 군인들이 사용한듯한 웅덩이 같은게 있고 마루금은 자측으로 꺽어서 내려간다
마루금은 자측으로 꺽어진다
견자산에서 내려서니 현충탑이 나오고
견자산에서 현충탑까지는 마루금으로 진행 되었고 현충탑에서부터 마루금에 길이 없어서 내려섯더니 좌측으로 좀 벗어난 지점이라 도로따라 우측으로 내려간다.
앞에 보이는산은 마루금에 있는 산이 아니기 때문에 갈수도 없다
견자산에서 현충탑쪽으로 가지말고 강화 나들길로 내려섯으면 바로 이곳으로 내려서게 되여 있다
강화산성은 사적 제132호. 고려가 몽고의 침입으로 인해 강화도로 천도할 당시 궁궐과 함께 축조되었다. 원래 내성.중성(中城)·외성(外城)의 3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성이 규모있게 궁궐의 내성으로 축조된 것은 1234년(고종 28) 1월부터였고. 당시의 성은 토석혼축(土石混築)이었다.
그리고 이 내성을 방어하기 위한 중성이 축조된 것은 1250년(고종 37)으로. 둘레가 약 7㎞에 달하는 토성이었다. 또 중성을 둘러싸는 외성은 1233년부터 축조하기 시작하여 1235년에 전국 주(州)·현(縣)에서 일품군(一品軍)을 징발하여 대대적인 공사를 벌인 결과 동쪽 육지를 바라보는 선을 따라 3만 7.070척에 달하는 성이 1237년에 일차 완성되었다.
고려시대의 강화 내성에는 고려 궁궐과 관청이 들어서 있었는데. 그 규모나 배치를 모두 송도(松都 : 지금의 개성)의 것을 옮겨놓은 듯이 비슷하게 하여 왕족과 귀족들은 송도에서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생활을 영위했다. 궁궐의 정문은 정남향의 승평문(昇平門)이었다. 한편 중성에는 모두 8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송도의 것을 그대로 본떠 동에 선인문(宣仁門). 서에 선기문(宣祺門). 남에 태안문(泰安門). 북에 북창문(北昌門)을 두었고. 동남에 장패문(長覇門). 서남에 광덕문(光德門). 서북에 선의문(宣義門). 동북에 창희문(彰熙門)이 있었다.
그러나 고려와 몽고의 강화가 성립되어가던 1259년(고종 46) 몽고의 요구로 내성이 헐리게 되었고. 외성도 허물었다. 그리고 고려정부가 완전히 송도로 환도하는 1270년(원종 11)에는 궁궐도 헐리어 현재는 궁궐터마저 불완전하게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있자 인조가 잠시 피난했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봉림대군을 비롯한 빈궁(嬪宮)들과 신하들이 피난했으나 청군에 의해 강화성이 함락되면서 포로가 되었다. 이렇게 외침이 잦자 조선정부는 이후 수차에 걸쳐 강화성을 개축하여 화강암의 석성으로 바꾸고 여장(女墻 : 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도 설치했다. 이렇게 하여 강화성은 4개의 성문과 4개의 암문(暗門). 남·북·서쪽의 장대(將臺)와 2개의 수문(水門)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현재 북악과 남산을 연결하는 지역에 남아 있는 성벽의 일부와 성문은 거의가 조선시대에 축조되어 1970년대에 보수된 것이다. 동문은 망한루(望漢樓)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그리고 서문은 첨화루(瞻華樓)로 1711년(숙종 37)에 건립되어 그동안 퇴락되었다가 1977년에 개축되었다.
남문은 안파루(晏波樓)로 1711년에 건립되었으나 1955년 홍수 때 무너진 것을 1975년에 복원한 것이다. 북문은 1783년에 건립하여 진송루(鎭松樓)라 했으나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77년에 복원했다. 조선시대에는 성내에 많은 관아가 들어서 있었으나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당시 많은 건물이 소실되어 현재는 고려 궁터에 동헌과 이방청(吏房廳) 등이 복원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서문 근방에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강화도조약이 조인되었던 연무당(鍊武堂)터가 있다.
강화산성 동문을 지나면 바로 우측으로 강화중학교가 있다
담장 안으로 랜즈을 디리밀고 찍어본다
수령이 600년이 넘엇다는 느티나무 두그루
강화산성 북문에 닿고보니
지형도에는 여기위치를 북문고개라고 표기되여 있다
북문에 대한 안내문
북문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잡으면
화장실이 있고 화장실 뒷쪽으로 진행되는데
군부대로 올라가는 길이다
조금 올라가다 보면 마루금에는 길이 안보이기는 하지만 삼각점봉이라 삐집고 들어가 보니 소슬바람님 과 맨발 선배님 리본이 보인다.
삼각점은 깻끗하게 청소를해서 찍어본다
군부대 건물과 마딱트리면 좌측으로 내려서서 부대건물을 우회한다
부대 건물을 벗어나니 정비를한 듯한 길이 나오고
이내 방화선으로 이여진다
군용삼각점을 지나고
계속되는 방화선
우측으로 고려산이 우뚝하게 버티고 있다
도로에 내려서면 48번 국도이고 여기위치가 진고개이다
좌측 고갯마루로 올라가면
우측 우도로 들어가면 무루금이다
진고개에서 15분여만에 다시 도로에 내려서면 좌측으로 국화저수지가 있고
우측으로 조금 이동해서 옹벽이 끝나는 위치에서 산으로 올라간다
비실이 선배님께서 반겨 주십니다
고려산 오름중에 우측으로 가족묘지가 나오면서 조망이 열리고 자세히보니 중앙 저멀리로 개성에 송악산이 보인다.
카메라가 션찮아서 맨눈으로 보는것 만도 못하다
쭈욱 최대한으로 땡겨보아도 별로 나아보이지도 않는다
날씨가 좋으면 선명하게 보일 수 있을텐데
두개의 돌탑이 있는 돌탑봉을 지난다
등로에 군용 삼각점을 만나고
우측으로 고인돌체육관
좌측으로 국정마을 갈림길을 지난다
안부에 내려서니 우측으로 백련사
좌측으로 청련사 갈림길이고 길다란 의자가 몇개 놓여있다
고려산 오름길은 반질반질 하다
고려산 정상이 가까워지고 마루금은 직진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정상을 갈려면 우측으로 가야 한다고 해서 강화 나들길인 우측의 테큭릴로 돌아간다
5분여 돌아가니 정상의 군부대로 올라가는 도로을 만나고 우측으로 조망이 팡팡 터진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전 봄날에 진달래를 보겠다고 왔던 그 길이고 낙조봉으로 이여지는 진달래능선이 보인다
살짝 우측을보면 별립산(別立山:399.8m)이 멋드러지게 보인다
진달래능선을 중심으로 좌측에 낙조봉 우측에 별립산
그리고 석모도와 교동도
잠시후 헬기장에 올라서면 진행해야할 혈구산이 마주 보인다
헬기장에서 별립산과 교동도 내가면의 황금벌판을 조망한다
별립산을 쭉 땡겨보고
고려산 정상을 올려다 본다
정상에는 미군부대가 차지하고 있어서 사실상 출입을할 수 없는 곳이다.
고려산(高麗山:436.3m)은 강화군 강화읍. 내가면. 송해면. 하점면의 경계에 솟아 있는 산으로 정상은 미군부대가 자리하고 있어서 출입을할 수 없고. 정상 아래 커다란 헬기장 옆에 볼품없는 나무 기둥을세워 놓고 정상이라고 한다.
고려산은 강화 6대산의 하나로 마니산摩尼山:(472.1m). 혈구산(穴口山:460m). 진강산(:443.1m).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1696년 편찬된 강지도에 홍릉과 국정.적석.백련등의 세 절이 있다. 고 기록되여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강화부 서쪽 15리에 있으며 강화부의 진산이다라고 되여 있다.
고려산은 고려의 정기를 품고 있는 산으로 신성한 연못의 물고기가 중국 천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쳤고 연못의 연꽃이 떨어진 다섯 곳에 오련사를 이었으며 고구려 장수 연개소문이 태어난 전설이 있는 곳으로 적석사. 백련사. 청련사 등 사찰과 고인돌군락지. 고구려 토성. 오련지. 홍릉 등 문화재가 분포하여 역사탐방 여행으로 많이들 찿으며 서쪽 적석사를 가다보ㅕㄴ 솔밭을 지나고 갈대밭을 지나 낙조봉을 만날 수 있는데 저녁에 서해 수평선 바닷물을 붉게 물들이며 지는 일몰 광경은 강화 8경중 하나이다.
고려산의 옛 명칭은 오련산이다. 고구려 장수왕 4년(416)에 천축국 스님이 고려산에 올라 다섯색의 연꽃이 피어있는 오련지를 발견하고 다섯송이의 연꽃을 날려 그 연꽃이 떨어진 자리에 적련사(적석사). 백련사. 청련사. 황련사. 흑련사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또한 고려산은 그 인근에 130여기의 고인돌을 품고 있다.
고려산이란 지명은 1232년 몽골의 칩입으로 백성들이 도륙당하거나 말거나 이곳에서 무신정권의 비호는 받았던 고려 왕조는 불과 38년 만에 강화 시대를 접고 개경으로 돌아간다.
고려산 주변에는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하고 정권을 유지할 수 없었던 무신들은 삼별초라는 이름으로 진도.제주도를 거쳐 몽고에 맞서다가 토벌당한다.
진행방향을 살펴보고
고려산 헬기장에서 건너다 본 혈구산과 우측으로 고도를 낮추며 솟아 있는 퇴모산
고려산을 내려가는 중에 좌측으로 국화저수지와 강화 읍내가 내려다 보이고 한남정맥의 끝자락 문수산이 보이고 우리가 여기까지 올라온 산줄기가 선명하게 조망된다
쭉 한번 땡겨도 보고
나무 계단으로 내려서면 강화 나들길이 마루금을 넘어 가는데
고개의 지명이 있을법 한데 지명에대한 자료는 찿을 수 없었다
강화 나들길 우측모습
좌측 모습
우리는 혈구산 방향으로
혈구산으로 오름길도 지맥에서 보기드믄 부드러운 꽃길
무인 산불감시 탑을 지나고
바위가 몇개 놓여 있는 어느 무명봉을 지난다
임도에 내려서니 선답자님들 표지기가 방갑고
고비고개에는 출렁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고비고개는 강화군 내가면 고천리에서 강화읍 국화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8번 도로가 지나가는 곳으로 이곳에서 고려산과 혈구산으로 일반 등산객들이 많이 다닌다.
고비라는 지명은 강화의 옛 행정관서가 있었던 곳으로 고읍(古邑)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고읍 은 고비 고부 로도 불리며 지형도에는 나래현으로 표기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강화로 수도를 옮기고 39년 동안 몽골과 맞서 싸우다 개경으로 돌아갈 때 강화도의 궁궐과 성곽이 몽골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무렵 강화의 옛 행정관서가 내가면 고천리로 옮겨와 심주(心州)라고도 불렀는데 이후 심도(心都)는 강화의 별칭이 되었다.
관아터. 향교터. 형옥터와 장터라 전해오는 곳이 있으며 조선 세종때 행정관서가 현재의 읍내로 다시 돌아갈 때까지의 강화의 행정중심지였다고 한다.
고비고개는 출렁다리로 건넌다
고비고개에서 우측으로 내가면 고촌리 방향
좌측으로 국화리 방향
출렁다리를 건너와서 돌아본 고려산
혈구산 오름중에 좌측으로 200여 미터 벗어나 있는 216.8봉 삼각점봉을 다녀온다.
지독한 잡목숲을 헤치고 왔는데
아쉽게도 삼각점은 식별을할 수 없다
고비고개에서 두개의 봉을 힘겹게 치고 오르고 세번째 봉에 올라서니 혈구산.
혈구산(穴口山:460m)은 강화군 강화읍. 선원면. 불은면. 양도면. 내가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용혈의 근원이자 고려 정기를 품은 산으로 여신의 성격을 띠었으며 예로부터 용이 나고 국가의 재난을 알리는 곳. 대운산( 戴雲山)이 하늘에 닿아 있다는 의미를 지닌 산으로 마니산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머리부분에 해당하는 곳이라 전해진다
혈구산이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정상에 올라 주위를 보면 저절로 솟구치는 살아숨쉬는 산으로 정기가 산 정상으로 항상 넘쳐 흐르고 또한 강화 중앙부에 위치하여 강화 전경을 구루 볼 수 있는 산이다.
산 이름은 강화군 옛 지명인 혈구군(穴口郡)에서 유래 되었거나 문헌에는 혈구진으로 기록되어 있는 오래된 성터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혈구산에서의 조망은 사방팔방으로 막힘이 없다..
우선 인천의 진산인 계양산을 담아보고
황금벌판이 펼쳐지고 한남정맥의 끝자락 문수산이 마주 보이고 그 우측으로 히미하게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까지 보이지만 날씨가 흐릿한 원인도 있지만 카메라가 잡아주질 못한다
좌측으로는 북녁땅 황해도의 산줄기들 송악산
날씨가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나온 쪽으로 고려산이 우뚝하고
진달래능선과 낙조봉 넘어로 별립산까지
국수산과 내가 저수지
앞에 보이는 봉우리가 퇴모산인줄 알았는데 퇴모산은 다음으로 보이는 뾰족한 봉이었다
다음구간에 진행할 덕정산
마루금에서 우측으로 벗어나 있는 진강산 그리고 강화도에서 최고봉인 마니산
쭈욱 당겨보고
혈구산 정상에 있는 지적 삼각점
백두산까지 499km
한라산까지 486km
퇴모산 방향으로 진행
아찍까지도 앞에 봉이 퇴모산 인줄.....
퇴모산인줄 알고 올라서니 좌측으로 안양대학 강화캠퍼스 갈림길이고 우리는 강화농업기술센터 방향으로 내려선다
이번에는 우측으로 천주교야영장 갈림길을 지난다
퇴모산 정상표지판이 나무 판대기로 너무 초라하다
퇴모산은 강화군 내가면과 불은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단군 왕검이 혈구산에서 모()를 세우고 퇴모산에서 끝 맺음을 하셨다는 유래가 있는 산이다.
퇴모산 아래에는 안양대학교 강화캠퍼스가 있고 커다란 채석장이 있다.
퇴모산의 삼각점은 3등 삼각점 이라는데 식별을할 수 없고
퇴모산에서 선원면을 내려다 보고
계양산도 건너다 보고
덕정산 진강산 마니산을 바라보고 내려선다
강화농업기술센터에 내려서며 강화 섬 산줄기 한구간을 마무리 짓는다
다음구간 들머리 확인하고
버스류장에서 15분정도 기다리니 70-1번 버스가 오고. 강화터미널에서 영등포행 88번 버스로 환승해서 청소년수련원 앞에서 하차하고 도보로 10분정도 걸어서 강화인삼센터 휴게소에 아침에 주차해둔 차량회수 한다
소요경비
이동거리=72km(왕복)
유류비=5.230원(연비15km/디젤1.090원)
톨비=갈때 2.200원/올때 없음
버스요금=2.500원
하산식=52.000원
합계=61.93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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