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대간1정간13정맥
부뜰이와 천왕봉이 걸어온 정맥길(검정색)
금북정맥이란.
백두산에서 지리산을 향하여 줄기차게 달려가던 백두대간이 속리산 천왕봉에서 가지를 쳐
안성의 칠장산까지 한강과 금강의 물줄기를 가르며 이어간 한남금북정맥이 안성 칠장산에서
다시 가지를 쳐 금북정맥과 한남정맥으로 가른다.
금북정맥은 경기도 안성의 칠장산(491.2m)에서 충남 태안의 태안반도 안흥진까지
금강의 윗쪽에서 물길을 모으는 산줄기로 거리는 약 280km에 달한다.
산경표에서는 칠현산에서 분기한다고 되어 있지만 칠현산군에 칠장산도 포함되고
실제 도상거리도 2km밖에 되지 않은 가까운 거리이기 때문에 산경표와 현대의 지리가
맞아 떨어지는 곳이다.
금북정맥은 분기점 칠장산에서 칠현산 - 서운산 - 성거산 - 국사봉- 광덕산 - 백월산에서
방향을 전환하여 오서산 - 보개산 - 수덕산 - 가야산 - 성왕산 - 백화산 - 안흥진으로
약 280km를 이어간다.
백두대간은 험한 산줄기가 굳건한 성이되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각 나라의 경계선이었던데 비해 한남금북정맥의 주변은 백제, 고구려, 신라의 각축장이되었다.
한편 금북정맥은 금강의 수계를 형성하면서 조선시대에 차령을 중심으로 그 문화적 교류가 남북으로 나누어 지다 호서지방으로 접어들면서 해양문화와 육지문화가 서로 교류하고 외국의 문물까지 교역하는 길이 된다. 서산 마애삼존불과 태안 마애삼존불은 중국 불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그 길목에 형성된 문화들이다. 또한 천주교의 유입이 이곳 안흥진을 경유하여 들어왔기 때문에 금북정맥 인근에는 순교지가 많다.
경기도 안성시 칠장산(七長山:491m)에서 태안반도(泰安半島)의 안흥진(安興鎭)까지 금강의 서북쪽을 지나는 산줄기로써 길이는
약280km
이며, 한반도 13정맥의 하나이다.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의 끝인 칠장산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칠현산(七賢山:516m)·청룡산(靑龍山:400m)·성거산(聖居山:579m)·차령(車嶺)·광덕산(廣德山:699m)·차유령(車踰嶺)·국사봉(國師峰) 등 충남을 가로질러 청양의 백월산(白月山:395m)에 이르고, 여기서 다시 서북으로 뻗어 오서산(烏棲山:791m)·보개산(寶蓋山:274m)·월산(月山:395m)·수덕산(修德山:495m)·(678m)에 이르러 다시 서쪽으로 뻗어 팔봉산(326m)·백화산(白華山:284m)·지령산(知靈山:218m)·안흥진으로 이어진다.
한반도에는 1대간1정간13정맥이 있다.
그중에 남쪽에서 탑사를 할수 있는것은 남북을 합쳐서 하나뿐인 백두대간은 반쪽만 가능하고.
한북정맥 또한 북쪽에서 남쪽으로 넘어온 산줄기라 전구간을 걸을 수는 없다.
남쪽에서 탐사사 가능한 1대간9정맥이라 함은.
1.백두대간.
1.한남금북정맥.
2.한북정맥.
3.한남정맥.
4.낙동정맥.
5.낙남정맥.
6금남호남정맥.
7.호남정맥.
8.금북정맥.
9.금남정맥.
우리산꾼들의 로망이라 할수 있는 1대간 9정맥중 이제 금북정맥 하나를 남기고 있다.
개인적으로 2정맥을 완주 하였고 산악회에서 6정맥을 완주했다.
산악회 정맥팀에서 지금까지는 무박으로 진행을 하였는데.
금북정맥은 당일산행으로 진행한다고 한다.
여러가지로 고민을 많이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결론은 마지막으로 하나남은 금북정맥은 둘이서 마무리 하기로 결론을 내린다.
장마가 시작되는가 싶더니 장마전선은 저 아래쪽으로 물러나고.
폭염주의보 가 내린다.
금욜날 퇴근을 하여 미리준비된 물품을 챙긴다.
준비물이라 해바야 한끼 식사분과 간식거리로 약간의 과일.빵이 전부이고.
냉동된 물.우유.맥주. 물종류가 4리터가 넘는다.
밤10시쯤에 출발하여 들머리인 칠장사 주차장에 12시에 도착하여 새벽4시쯤에 산행을 할 생각으로 차내에서 눈을 붙인다.
3시30분에 기상하여 산행채비를 갖추고 주위를 둘러본다.
우리가 걸어온 금북정맥 길.25.9km.접속거리 제외.(알.접1.1km).
누적시간 11시간26분.
산냉일=2016년7월9일
산행지=금북정맥 1구간(안성.진천.천안)
산행경로=칠장사=>3정맥분기점=>부부탑칠순비=>칠현산(516)=>공림정상513)=>덕성산(519)=>454.6봉=>무티고개(돌탑)=>사장골산(400)=>무이산갈림길=>만디고개(돌탑)=>고라니봉(413)=>옥정재(옥정현)=>409.9봉=>470.8봉(철판헬기장)=>440봉=>35번송전탑=>422.3봉=>장곡재=>배티고개(이티재)=>배티성지갈림길=>석남사갈림길=>서운산(548)=>청룡사갈림길=>420봉=>440봉=>395.4봉=>360봉=>엽돈재.
거리 및 소요시간=25.9km(접속1.1km)/11시간26분.
칠장사 앞에 버스정류장.
산행후에 차량을 회수하기 위해서는 다시 와야 하기때문에 버스 시간표을 살펴보니 죽산시외터미널에서 이곳으로 들어오는 버스가 오후 시간대에는 13시와 18시30분이다.
칠장사는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번지에 소제한다.
7세기 중엽 신라 선덕여왕(532~647) 대에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고려 현종 5년 (1014년)에는 해소국사가 왕명으로 중창하였고 칠장사와 칠현산이란 이름은 해소국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7명의 악인을 교화하여 현인으로 만들었다는 설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려우왕 9년(1383년)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충주 개천사에 있던 고려의 역조실록을 이곳으로 옮겼을 정도로 당시 교계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였다.
인조 원년(1623년)에는 인목대비가 아들 영창대군과 아버지 김제남을 위한 원찰로 삼아 크게 중수하였다.
현종 15년(1674년), 숙종 30년(1704년), 영조 원조(1725년), 고종 15년(1878년) 등 수차례 중건을 하였으며 1970년대 이후 지속적인 수리를 통해 지금의 가람을 이루고 있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과 원통전을 비롯한 15동의 건물과 석탑, 동종 등이 있으며, 국보 제296호 칠장사 오불회괘불탱을 비롯하여 혜소국사비, 철제당간 등 많은 지정 문화재가 있다.
또한 오랜 역사와 함께 칠장사에는 여러 구전이 내려오는데, 궁예가 10세까지 활쏘기를 하며 유년기를 보냈다는 활터가 남아 있으며 의적 임꺽정이 갖바치스님 병해대사에게 바친 꺽정불 이야기, 암행어사 박문수가 과거시험을 보기 전에 나한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잠이 들었는데 꿈에 나타난 나한님이 과거시험 구절을 가르쳐주어 장원급제했다는 설화가 내려오고 있다.
안내문은 클릭해서 읽어보기.
수험을 앞둔 이는 누구나 이다리를 건너면 합격한다는 합격다리.
산행을 시작한 칠장사에서 20여분 만에 첯 이정목을 만나는데.
여기가 정맥길이고 3정맥분기점은 칠장산 방향으로 200m지점에 있다.
3정맥분기점을 다녀와서 칠현산 쪽으로 진행한다.
한남금북정맥.한남정맥.금북정맥으로 3정맥으로 분기하는 지점이다.
박문수가 꿈속에서 계시를 받았다는 시제와 답안에 대한 안내문이다..
클릭해서 읽어보기.
어느 부부의 칠순비.
천왕봉이는 새벽 산행에 항상 나뭇가지를 들고 다닌다.
각종 날벌레와 거미줄을 걷어내기 위한 용도로 쓰인다.
칠현산의 유래를 보면. 칠장사를 품은 칠현산은 안성 출신인 혜소국사가 일곱 명의 악인을 교화시켜 현인을 만들었다고 하여 유래된 이름이다.
또한 어린 궁예는 이곳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며 미륵 세상을 꿈꾸었고.
어사 박문수는 과것길에 이곳에서 하루 묵으며 나한전에서 정성어린 기도를 올린 끝에 꿈에서 과거 시제를 받아 장원급제를 했다.
의적 임꺽정을 계자로 받아들인 갓바치 스님의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정목에 거리표시를 눈군가 문질러서 지운 흔적이 보인다.
잘못된 거리표시라 그랫을 거란 생각을 해본다.
공림정상(513)
덕성산은 충북 진천군 광혜원면과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서운산과 칠현산 사이에 있으며 덕성산 남쪽 계곡에는
구암리
(鳩岩里) 무술리[無愁里]라는 작은 마을이 있고
또한 이곳은 진천 태생으로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金庾信:595∼673) 장군이 소년시절부터 용화향도(龍華香徒)라는 낭도(郞徒)들과 무예등 화랑도(花郞徒) 정신을 연마하던 터가 있는 유서깊은 산이다.
덕성산에서 인증후 쉬고 있으려니 일출이 시작되는데.
동쪽으로는 조망이 안트여 나뭇가지 사이로 떠오르는 일출을 본다.
가야할 정맥 마루금.
가끔씩 사람을 놀라게 하는것들.
제일 많이 보이는게 고라니이고 가끔씩 멧돼지들을 볼땐 머리털이 삣쭉삣쭉스는 섬뜩할 때도 있다.
작은 돌탑이 있는 무티고개.
이미 수십년전에 사람의 발길이 끊긴 무티고개를 지나고.
사장골산을 지난다.
곧이여 만디고개도 지난다.
고라니봉에서 아침식사를 할 예정 이였는데.
천왕봉이가 허기가져서 못 가겠으니 밥을 먹고 가자하여 고라니봉을 1km도 안남긴 지점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산행을 시작한지 4시간이 지났고 10.3km가 진행된 지점이다.
식사를 마치고 15분진행하니 고라니봉에 닫는다.
고라니봉이란 주위에 고라니가 많이 서식해서 고라니봉이라 했다
.
고라니봉에서 20여분 진행하니 옥정재에 떨어진다.
옥정재는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옥정리와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신계리의 경계인 금북정맥을 넘는 고개다.
지형도에는 옥정현(玉井峴)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고갯마루 안내판에는 옥정재로 표기되어 있고. 현지인들도 옥정재로 부른다.
경기도 안성쪽.
옥정재 정상에는 차마루란 작은 카페가 하나 있다.
메뉴는 각종차와 음료을 판매한다.
천왕봉이는 냉커피로 나는 콜라로 달아오른 몸을 식히고 진행한다.
경기도 안성쪽.
이쪽은 충청북도 진천쪽.
옥정재에서 20여분 치고오르니 삼각점이 있는 409.9봉에 오른다.
409.9봉에는 3년동안 같이 정맥길을 걸은 소슬바람님의 표시기가 나를 반긴다.
소슬바람님은 몇 구간남은 금북정맥을 끝으로 1대간9정맥 졸업을 눈앞에 두고 있다.
409.9봉에서 20여분 빡쎄게 치고 오르니 470.8봉에 오르는데.
정상에는 바닥을 철판으로 깔아만든 헬기장이다.
여기다가 왜 이런 헬기장을 만들엇는지는 알수 가 없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군부대가 있는것도 아니고 별달리 눈에 뛰는게 없다.
35번 송전탑을 지나고.
잘 정비된 임도길을 따른다.
35번송전탑에서 30여분 임도길을 걸으니 시멘트로 포장된 임도길에 내려서는데 여기가 지도상에 장고개일 것으로 짐작된다.
좌측으로 방향을 잡으면 중앙cc클럽으로 내려가게 되고.
우측을 살펴보면 정맥꾼들의 표시기가 걸려있는 곳으로 올라간다.
장고개에서 20여분 치고오르니 삼각점이 있는데 몇봉 인지는 확인이 안된다.
좌측으로 도로가 보여 내려서니 배티재로 오르는 도로는 분명한데.
지도에는 아직 거리가 꽤 되여보이고 한참더 가야될거 같아서 다시 능선길로 진행한다.
꾼들중에 더러는 도로로 진행했다는 후기를 본적이 있다.
갑자기 급 내림길에 로프가 메여져 있다.
조심조심 내려오니 여기가 배티재 이다.
좌측은 충북 진천군 백곡면이고.
우측은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이다.
배티재(이티재)는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상중리와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를 이어주는 해발 400m가 조금 안되는 꽤 높은 고개이다.
옛날에는 이 고개를 넘을 때 이틀에 걸쳐 넘엇다고 이틀재라고 불렀던 것이 이티로 변음되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고갯길의 경사가 심하고 험난하다.
그런데 그 이름이 영화의 외계인 ET와 소리가 같아서 고유의 우리말이라기보다는 왠지 영어에서 온 외래어인 것처럼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6.25전쟁때는 중공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베티고지는 영어로 Betty로 기록되면서 전쟁 중에 외국인들이 이름 붙인 것처럼 베티고지라고 굳어져 버렸지만 원래 지명은 우리말의 배티인 것이다.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노고산 아래 위치한 진천 배티 성지(聖地)는 많은 순교자의 정신을 기리고 기도하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는 곳 이기도 하다.
동네어귀에 배나무가 많아 배나무고개. 즉 이티(梨峙)라는 말이 생겨났고 이것이 순수한 우리말로 배티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 조선 영조 때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을 때 백곡을 지나다 이 마을 노인 이순곤이 이끄는 주민에게 패한 뒤 다시 안성 쪽으로 향하다가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에게 패하였다는 데서 패치라 불리다가 배티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배티고개는 지난해 프란체스카 교황이 다녀가신 곳으로 유명해졌는데 역시 외래어같은 어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배티고개를 이곳 주민들은 이티고개라고도 부르며 배티고개 밑에 있는 마을도 배티와 이티를 혼용해서 부른다.
진천은 어딜가나 생거진천(生居鎭川)이란 말이있다.
풀이를 해보면 살아서 진천에 거주하라는 뜻이다.
용인에 가면 사거용인(死居龍仁)이란 말이 있다.
죽어서는 용인에 묻히라는 뜻이겠지.
용인에는 그 만큼 명당자리가 많다는 뜻일게다.
이를 합해서 생거진천.사거용인(生居鎭川.死居龍仁)이라 한다.
이 말에는 그 이유에 걸맞는 전설이 있다.
옛날 충청도 진천 어느 산골에 허생원이 살았는데.
딸을 잘 키워서 경기도 용인으로 시집보냈다.
이 딸이 시집을 와 보니 시부모님이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소곤소곤 말을 하는데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새애기가 들어와 식구가 하나 늘어서 기쁘지만 또한 먹을 것이 부족하여 걱정이구나! 라는 시부모님의 대화였다.
허부인은 시집이 가난하기 이를 데 없었다는 것을 알고, 이전 말에 대복은 재천(大福在天)이요 소복은 재근(小福在勤)이라고 하였으니, 나 하나가 부지런하면 어떻게든 이 집 가난을 면할 수 있지 않겠는가하고 각오를 하였다.
새댁이 말하였다,
아버님, 어머님, 저는 이제 이 집 식구가 되었나이다.
저는 원래 남정네처럼 부지런하고 씩씩하다고 집이나 동네에서 소문이 났는데. 이제 시집을 왔으니 여기서도 부지런하고 씩씩하게 일을 하여 살림을 일구고자 합니다.”
과연 그날부터 말한 대로 허부인은 부지런히 남자처럼 일했다.
남편과 같이 일을 하니 장정 둘이 일을 한 셈이라서 재산이 늘고, 동네 사람은 저런 상머슴 같은 여자가 다 있는가 하고 입을 떡 벌렸다. 게다가 부부금슬도 좋으니까 시부모는 이래저래 대만족 이었다. 살림도 차차 늘어났다. 이제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되었고 떡두꺼비 같은 아들도 낳았다.
아, 행복하여라!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남편이 우연히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더니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갑자기 남편을 잃은 허씨 부인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 눈앞이 캄캄하였다. 그 후 시부모님이 연달아 돌아가셨다.
과부 신세가 된 허씨부인 날마다 눈물로 밤을 지새우니 의지하고 하소연하고 마음껏 울고 싶은 곳은 이제 친정뿐이었다.
그래서 하루는 친정에 가려고 소복을 한 채로 친정인 진천 땅으로 걸어갔다. 험난한 산길을 허위단심 올라가다 보니 고갯마루 직전에 도착하였다.
그때 마침 맞은 편에선 한 선비가 괴나리봇짐을 지고 올라오고 있었다. 진천의 유생(儒生)인데, 지금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다가 이 고갯마루에 당도를 한 것이다. 유생이 고갯마루에서 잠시 쉬고 있노라니 소복을 입은 여인 하나가 허위단심 올라오고 있었다.
이 산 마루에 누가 있어서 저 여인을 붙들고 이야기를 한들 들키랴?’
이런 생각을 하는 때인데, 어디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건너편 소나무 아래애 자기처럼 쉬고 있는 노인이 있었다.
“부인, 사람 좀 살려주십시오. 티끌이 눈에 들어가 한 발짝도 내딛을 수가 없습니다. 아이구” 하고 엄살을 부렸다. 허씨 부인은 아무리 남녀가 유별해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부끄럽지만 우선 사람을 살리고 볼 일이라서 이 선비의 눈을 비집고 입으로 “후우” 하고 불었다.
유생은 꾀를 내 바로 눈앞에 이 아리따운 여인과 입을 맞춘 듯 숨결을 빨아들이는 일을 성사 하였으니 천만다행이었다. 유생은 진심을 담아 말하였다.
“고맙습니다. 부인께서는 어디로 가십니까? 저는 진천에 사는 유생인데 지금 한양에 과거를 보러 갑니다”라고 하는데 허씨 부인은 그저, “눈이 나으셨으면 어서 한양에 가십시오” 하고 묻는 말을 다른 데로 돌리면서. 이렇게 헤어졌다.
진천 사는 친정아버지는 홀로 된 딸이 걱정이 되고 그리워서 하루는 열일을 제쳐놓고 용인 딸네 집으로 찾아가는 중이였다. 거의 고갯마루에 다다랐을 때 별 해괴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아무도 없는 산중이라고 저 남녀가 저 무슨 입맞춤인가? 더구나 여자는 소복을 하고 외간남자와 못된 짓을 해? 에잇, 쌍놈쌍년 같으니.도대체 저 여인의 쌍판을 좀 보자며 친정 아버지는 소나무 밑에서 쉬고 있다가 다가오는 그 여인을 보고 그만 기겁을 하고 후닥닥 내려갔다.
그런 줄도 모르고 허씨 부인은 한참 후에 친정에 도착하였다. 얼마나 그리운 친정집, 보고 싶은 아버지, 어머니인가? 동기간인가? 부모님을 붙들고 원 없이 한 없이 이 설움을 쏟아놓고 싶엇다. 사립문에 들어서 소리를 질렀다.
“엄마, 아부지 저 왔어요!”
그런데 청천벽력 이었다. 아버지가 뛰어나와 호통을 쳤다. 불문곡직하고 소리를 질렀다.
너는 출가외인 이거늘 어찌 내 집에 발을 들여놓는단 말이냐? 당장 돌아 가거랏
옛? 아버지, 왜....너는 내 딸이 아니다. 꼴 보기 싫다. 냉큼 돌아가거랏!” 하고 문을 탁 닫고 들어가 버렸다. 이 무슨 일인가? 허씨 부인은 그리던 친정 집 마당에 발 한 자국도 내딛지 못하고 돌아섰다. 용인 집으로 돌아가다 그만 길에서 쓰러졌다.
마음씨 고운 어떤 집에서 얼마 동안 정양을 하다가 다시 집으로 향하였다.
한편 서울에 과거를 보러간 유생은 그만 과거에 낙방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고갯마루에 당도할 때 쯤, 그 소복여인이 있었다.
과거에 낙방한 유생과 친정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허씨 부인은 이렇게 만났다 가슴 아픈 환경에서 만났다.
유생은 진정으로 위로하였다. 속으로는 가슴이 터질 듯 기쁘면서도. 허씨 부인은 의지할 곳이 없는 나의 외로운 심정을 달래줄 분은 이 사람뿐이구나 하고 그만 억울하고 폭폭한 심정에서 유생의 품에 안겼다.
용인에 아들은 시댁 삼촌에게 맡기고 진천에 사는 유생에게 다시 시집을 갔다.
과거는 다 잊었다. 시댁과 친정도 잊었다.
그렇게 독하게 마음을 먹고 오직 새 남편 유생만을 위하여 살고 열심히 부지런히 악착같이 일하고 살았다. 그래서 살기가 택택(澤澤)하였다. 고맙게도 아들까지 낳았다.
어느덧 세월이 흘렀다. 환갑을 맞이할 즈음에 그만 남편이 세상을 뜨고 말았다.
무슨 팔자가 두 번씩이나 과부가 된단 말인가. 이제 아들 하나를 의지하고 말년을 보내야 하는 허씨 부인.
용인에 사는 큰 아들은 부모 없이 작은할아버지 집에서 살레설레 컸고, 그때마다 나를 낳은 엄마는 어디 있는가 궁금했다.
이제 장성을 하여 재산도 모으고 혼인도 하고 보니 마음이 더욱 간절하였다.
나도 한번 남과 같이 부모를 모시고 살고 싶다. 부모님 환갑잔치도 해드리고 싶다” 하고 어머니 생각에 젖어 혼자 울기도 하였다.
이럴 것이 아니라 내가 기어이 어머니를 찾아 모시고 살아야겠다. 어머니가 살아만 계신 다면 어이 못 찾으랴.하고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드디어 어머니가 계신 곳을 알아냈다.
‘어머니는 진천에 사시는구나. 그냥 찾아갈 수 없으니 송아지라도 끌고 가야겠다.’
그리하여 어머니 계신 곳을 찾아갔다.
허씨 부인은 어떤 장정이 송아지를 끌고 와서 뵙자고 하니까 웬일인가 하고 나와 보았다.
찾아온 사람을 보니 정신이 번쩍 났다.
한시도 잊지 못한 어린 아들... 앗 닮았다! 앗, 저 눈 위 콩알만 한 사마귀... 혹시 용인에 사는....
그러자 찾아온 이가 허씨 부인을 왈칵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어머니, 엄마, 저에요, 용남이에요, 용인에 두고 온 아들이랍니다.
아가, 아들아, 내 아들아! 보고 싶었다. 용남아, 이리 잘 컸구나.
어머니, 얼마나 보고 싶었다고요. 얼마나 외로웠는 데요, 이제 드디어 찾았으니 떨어지지 말고 함께 살아요. 이것이 저의 평생소원 이었습니다.
그러자. 이 에미도 용인에 사는 너한테 얼마나 죄를 지었는지, 보고 싶었는지, 나도 너를 떼놓고 와서 한시라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단다. 이제 같이 살자, 아들아.
안됩니다.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어머니 여기 진천에도 아들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앞으로도 제 어머니입니다.
울고불고 하던 허씨 부인과 용남이는 그만 울음을 그치고 정신을 차렸다. 듣고 보니 이 말도 맞았다. 진천 아들이 말하였다.
어머니 난데없이 우리 집에 나타난 저 용인에서 온 아들이라는 사람이 아들 진짜로 맞습니까. 맞는다고 합시다.
사십 년을 산 우리 집을 떠난다는 말이 맞습니까.
이러고 보니 참으로 난처하였다. 용인의 아들도, 진천의 아들도, 사실 어머니도 난처하였다.
사정을 보면 어머니를 모셔다가 같이 살 수는 없었다.
그런데 평생소원은 모셔다가 같이 사는 것이다.
여러 가지 궁리를 하면서 “어찌한다! 어찌한다! 할 뿐이었다. 결국 관가에 소장(訴狀)을 냈다.
소장을 받아본 고을 원님도 어떻게 판결을 힐지 뾰쪽한 생각이 나지 않아서 저녁도 못 들고 골몰하고 누워 있었다.
손자가 쪼르르 달려와서 할아버지가 무슨 근심이 있으시냐고 물으니 원님이 소장 이야기를 하니까 손자가 간단히 말해버렸다. 손자 말을 들은 할아버지는 벌떡 일어나서 무릎을 탁 쳤다.
이튿날 관가에서 두 아들을 불러놓고 판결을 하였다.
용인에 있는 맏아들과 진천에 있는 다음 아들이 다 어머니를 모시려는 것은 지극한 효심이라 세상에 귀감이 되도다. 그런데 어머니 한 분이 두 군데 살 수는 없구나. 몸을 쪼갤 수도 없는 것, 그래서 내가 판결이 힘이 드는구나. 그래도 판결을 하겠다.
너희 어머니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진천에 살도록 하고, 죽은 후에는 용인에서 모시도록 하여라.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去鎭川 死去龍仁)이렇게 판결이 끝났다.
이리해서 생거진천. 사거용인 이라고 하는 말이 나왔다
배티재 숲속에서 쉬는시간을 갖는다.
냉동해서 가져온 맥주는 먹기좋게 녹았다.
짜릿하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시원함이란 말로 글로 표현을 못한다.
산경표 따르기 카페에 어느 님이 다녀 가셨는데.
닉넴이나 함자가 없네요.
서운산 정상에는 삼각점과 무인산불 경보기가 설치되여 있다.
한잔에 2.000원하는 달콤한 막걸리도 있다.
서운산 쉼터의 장면.
정상석에는 난데없이 산불조심 이라.
뒷면에는 산 높이가 새겨져 있고.
정상을 알리는 표시는 볼품없는 목조이다.
안내문은 클릭해서 읽어보기.
서운산 정상에서 200여미터 내려가면 갈림길이고 정맥길은 좌측으로 직진은 청룡사 방향.
이정목에는 오늘 산행을 종료할 엽돈재가 5.3km라고 안내한다.
엽돈재가 3.1km남은 지점에서 천왕봉이는 드러 눕는다.
달콤한 말걸리가 화근이 되였다.
한시간정도 진행하니 진천쪽에서 엽돈재로 올라오는 34번 도로가 보인다.
엽돈재에 이정목에서는 서운산정상이 5.4km라고 안내한다.
엽돈재의 풍경들.
엽돈재는 해발450m쯤 되는 고개로 34번 국도가 충남 천안시 입장면과 충북 진천군 백곡면을 지나는 곳으로 엽돈재의 이름은 여러가지가 있다.
또 다른 이름으로는 엽전재(葉錢峙). 엽둔재(葉屯峙). 엽둔티. 율둔티 등으로도 불리었다.
정확 하지는 않지만 산세로 봐서 아마도 산적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보부상 등 상인들이 이 재를 넘을때 산적들에게 통행료로 엽전을 지불 한데서 지명이 유래됐을 거란 이야기도 있다.
충남 천안시 입장면쪽.
충북 진천면 백곡면쪽.
다음 2구간 들머리는 부소산 방향으로.
총 경비.
이동거리(왕복)=216km.
유류비=약18.500원.
톨비=8.000원.
택시비=49.200원.
식대=갈비탕*2/14.000원.
합계=89.700원
Amira Swiss / Fal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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