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km이상지맥/천등지맥(완주)

천등지맥 1구간(천등지맥 분기점=>오청산=>다릿재)

부뜰이(윤종국) 2020. 9. 21. 00:25

지난주에 문수지맥에 들엇으니 순차적으로 진행한다면 당연히 문수지맥을 이여야 하지만 이번주는 추석을 앞둔 싯점이라 조상님 묘소 벌초를해야 되기 때문에 문수지맥을 뒤로하고 천등지맥을 한구간 진행하게 된다.

고향이 충북 단양군 대강면에 신구리라는 작은 산골마을이 고향인데. 지금은 친인척 이라곤 단 한명도 없는 곳이 되었다.

그래도 조상님들 묘소가 있는 곳이라 연중 행사로 형제가 모이는 날이다.

벌초를 해야될 묘소는 많지만 큰집 조카들과 나누어서 책임을지고 관리하다 보니 우리 형제가 책임져야 될 묘소는 3기 인데. 옛날에 낫으로 할 때는 그것도 하루종일 했었는데 지금은 기계를 돌리니 몇시간이면 일이 끝난다.

우리는 주말에 어디로든 나가는 버릇이 있어서 금욜저녁 퇴근하는 즉시로 출발하여 마을 입구에 있는 정자에서 비박을하고 동생은 아침에 내려오기로 한다.

실컨 자다보니 날이 훤히 밝아졌고 텅 하고 자동차 문닫는 소리에 동생이 도착했구나 라는 직감에 밖을 내다보니 동생이 도착하였다.

아침은 간단하게 라면으로 때우고 일을하러 올라가고 12시가 안돼서 일이 끝난다.

 

앞에 보이는 봉우리가 백두대간의 도솔봉 이죠

 

마을입구에 상징공원이라 해서 수백년은 된 느티나무가 있고 팔각정자 두체가 있고 물레방아가 있다.

어젯밤에 여기 팔각정자에서 비박을 하였고 일을 마치고 다시 돌아와서 삼겹살로 뒷풀이를 하고 쉬는 시간을 갖는다.

오늘도 시간이 넉넉한데

내일 하루을 집에서 딩굴수는 없는 일이라 동생한테 부탁하여 올라가는 길에 들 날머리 도움을 받기로 한다.

천등지맥은 3구간으로 나누어서 이참에 한구간을 진행하고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1박2일로 한번 내려와서 마무리를 지를 예정이다.

 

 

 

 

 

천등지맥 1구간 날머리 38번 국도 구(舊) 도로인 다릿재에 도착해서 우리차를 여기에 두고 동생 차량에 동승하여 약 9km지점인 배재고개에 들러서 저녁으로 먹을 떡국재료와 물 한병 그리고 막걸리 한통을 풀숲에 숨겨두고 들머리인 천은사로 이동한다.

다릿재에서 충주방향 

 

다릿재에서 제천 방향

천등지맥

부뜰이와 천왕이 걸어온 천등지맥

지맥길 20.9접속3.3/이탈)km/14시간40분

 

산행일=2020년9월19일

산행지=천등지맥 1구간(원주시/충주시/제천시)

산행경로=큰양아치=>천은사=>천은사 계곡=>백운지맥 접속=>천등지맥 분기점=>578.4봉=>967.5봉=>십자봉(983.8m)=>966.6봉=>718.2봉=>배재고개=>632.4봉=>옥녀봉(玉女峰:714.4m)=>시루봉?=>시루봉(695.4m)=>비지재=>702.6봉=>671.7봉=>강승갱이재=>687.5봉=>565.3봉=>602.8봉=>오청산(五靑山>656.9m)=>632.3봉=>484.7봉=>533.5봉=>다릿재

거리 및 소요시간=20.9(접3.3/탈)km/14시간40분

 

천등지맥은 한강기맥의 <삼계봉>에서 분기한 영월지맥이 치악산 남대봉에서 갈라지면서 백운지맥을 만들고 백운지맥은 치악재(가리파재)를 지나며 벼락바위봉에 올라섰다가 서진을 계속하며 백운지맥의 주봉인 해발 1,086m인 백운산을 지나 오두재를 거쳐 934봉에서 세갈래로 갈린다.

한줄기는 북으로 뻗어면서 큰양안치를 지나 덕고산과 명봉산으로 이어지며, 또 한줄기는 남쪽으로 500m 더 뻗어나가다 가십자봉(967m)에서 서쪽으로 동막봉과 작은양안치를 지나 미륵산으로 맥을 형성하는 백운지맥이다.

하지만 가십자봉에서 백운지맥과 갈라져 남진하는 능선이 또 하나 있는데. 이 맥이 이른 바 천등지맥이다. 천등지맥은 십자봉(983.3m)을 지나 966봉에서 남동쪽으로 삼봉산(909m)을 분기하고, 뒷산을 거쳐 배재에서 숨을 고른 후 옥녀봉(714.4m)을 들어 올린 후 동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시루봉(695.4m)과 오청산(656.9m)을 만나고 다시 남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다릿재를 지나 천등산(806.6m), 인등산(665.1m), 지등산(534.9m), 관모봉(628.4m), 부대산(626.9m), 주봉산을 지나 도상거리 42.5Km(실거리52km)의 맥을 형성하며 충주호로 그 여맥을 가라 앉히게 된다

 

 

오늘 천등지맥에 자리잡을 산패는 모두 11장

 

천등지맥 1구간 들머리인 천은사 입구에 도착하니 4시 17분이다.

 

연습삼아 한방 찍어보고

 

아주 오랜만에 둘이서 한장 더 남기고 동생 내외는 수원으로 출발하고 우리는 산문에 든다

 

우측에 계곡을두고 우렁찬 물소리를 들으며 올라간다

 

10여분 만에 천은사에 도착한다

 

좌측으로 작은 다리를 건너면 대웅전이 있고 우리는 우측으로 계곡을 따라 올라간다

 

원주의 천은사(天恩寺)는 흥업면과 귀래면을 경계로 하는 백운산 줄기에 위치한다.

이곳은 고구려 왕의 어거가 매지리에 머물고 신라왕의 어거가 운계리에 머물러서 그 경계인 이곳의 지명이 양어치였다고 한다.

천은사는 귀래 2리 천은사 계곡에 있는 조계종사찰을 말하며 백운산 십자봉 정상 아래 고려 때부터 승려들이 수행하던 백운암이 있었는데. 1900년대 폐사되였다.

1960년 충주 사람 홍성익이라는 처사가 몸에 병이 있어 백운암 터에서 백일기도를 올리던 중 천인(天人)이 나타나 금침을 놓고 사라지면서 저 아래 물이 양쪽에서 만나고 왼쪽 산에 미륵불이 있는 곳에 절을 지어 많은 사람들을 병고에서 구제하라 라고 하였다. 홍처사의 몸은 씻은 듯 나았고 곧 초막을 지어 천은사라 이름하고 수행정진하면서 침술로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었다. 1989년 서울 임송암 화상(林松岩 和尙)이 초막을 인수 조계종 월정사에 등록하고 중창 불사를 하여 1998년 5월에 완공하였다.

 

계곡을 열번정도는 이리저리 건너고 울창한 숲속을 여러번 들락날락 하면서 올라간다

 

1시간정도 올라가니 갈림길이 나오고 선답자들은 우측으로 많이들 올라간거 같은데

우리는 좌측 능선으로 올라간다.

10분 정도 올라가니 묘지가 나오고 좌측으로 백운지맥 마루금이 올려다 보인다.

 

 

그런데 이게 우찌 된겨?

묘지가 나오더니 더이상 길이 보이질 않는다.

묘지 근처에 잡목을 뚫고 울창한 숲으로 들어가니 잡목은 없지만 길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그동안 시도때도 없이 내린 빗물에 낙엽이 쓸려서 그런지 이리저리 gps에 의존해서 올라간다.

 

마루금에 가까워 올수록 커다란 바위들이 나오고 이리돌고 저리돌고 넘고 넘어서 백운지맥 마루금에 올라선다.

 

백운지맥 마루금에서 100 여미터 좌측으로 이동하니 천등지맥 분기봉에 올라선다

천은사 입구에서 3.3km가 측정되였고 1시간 48분이 소요되였다

 

천등지맥은 십자봉 방향으로 진행된다

 

분기점 인증하고

 

 

20여분 진행하여 원덕동 갈림길을 지나고

 

서서히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다

 

십자봉에 도착하여 여기저기 둘러보니 원주시에서 세운 정상석과 제천시에서 세운 정상석이 있고

두개의 정상석 가운데에 1등 삼각점이 자리하고 있다.

 

십자봉이라 불리게 된 유래을보면. 십자봉이라는 이름은 일제가 붙인 이름이고, 덕동리 주민들은 촉새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촉새와 십자매는 크기와 생김새가 비슷한 참샛과 조류로 촉새는 우리나라와 만주, 시베리아에 분포된 순수한 토종이지만, 십자매는 인도, 말레이반도 등 동남아시아가 원종으로 이새를 농조로 개량한 일본의 새라고 한다.

십자봉이라는 이름은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지형도를 만들면서 자신들의 애조인 십자매로 바꿔치기 한 것 이라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루빨리 우리 이름인 촉새봉으로 바꾸어야 한다.

 

십자봉 인증은 천왕봉이만

 

삼각점은 1등 삼각점으로 엄정 11

십자봉에서 야간산행을 준비한다

그런데 랜턴을 꺼내면서 아차 지난주에 랜턴을 끄는데 꺼지지 않는 현상이 있었는데

그걸 깜빡하고 그냥 가지고 왔으니 이거야 원

일단 밧데리를 끼우고 작동을 해보니 이게 웬일 작동이 된다.

 

우측으로 산촌마을 갈림길을 지나고

지맥은 덕동리 방향으로 진행한다

 

잡초가 무성한 헬기장에 도착하니 완전히 어두워 졌다

그런데 랜턴이 켜지질 않는다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만져 본다고 될 일이 아니다

천왕봉이가 앞장서며 랜턴 불빛을 최대한 아래로 비추면 앞서가는 천왕봉이 발이 보인다

바짝 뒤따르며 천왕봉이 발만보구 천천히 진행한다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 질 때쯤

 

966.6봉이 닿는다

천만 다행으로 등로가 부드럽고 까탈스런 곳이 없어서 좀 느리기는 하지만 큰 불편은 없다

 

966.6봉에 이정표에서는 지나온 십자봉이 0.7km이고

진행방향으로 화당리(배재고개) 방향으로는 거리 표시가 없다.

 

아이쿠 고슴도치로군 하마터면 밟을뻔 했네

 

뒷산에 올라서면 길다란 나무의자 두개가 마주보며 놓여있다

여기서 잠시 쉬면서 물 한모금 마신다

 

뒷산에서 인증을 남기고

 

용마산 1.8km라는 갈림길이 나오고 우리가 저녁밥을 보관해둔 배재가 900m라고 안내한다

 

배재가 내려다 보이는 위치에 벌목을 하여서 진행방향으로 옥녀봉이 우뚝하게 올려다 보이는데

카메라에 잡히질 않는다

우측으로는 백운지맥 마루금이 건너다 보이고 귀래면이 내려다 보인다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의 지명 유래를보면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쇄약해진 싱라를 고려에 이양한 뒤 전국의 명산을 두루 다니다가 용화산(미륵산)에 올라 수려한 경관에 반해 그 정상에 미륵불상을 조성하고 그 아래 학수사 와 고자암 이란 절을 짓고 말년에 잠시 의탁하였다 하여 귀한 분이 다녀가신 곳이라 하여 귀래(貴來)면이라 부르게 되였다고 한다.

 

배재고개에 내려서고 충북 제천시 백운면 방향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방향. 배재(拜嶺)라 불리게된 유래를 보면 배재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원주 용화산의 커다란 암벽에 미륵을 조각하게 하고 황산사에 종을 달게 하여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종일 치게 하였다. 그리고 종소리가 나면 이 고개에서 미륵불을 향해 절을 올렸다. 망국의 왕으로서 천 년 사직과 백성에게 속죄하는 절이었다. 그래서 이 고개를 배재, 배치 뱃재라고 불렀다.

 

뱃재와 운학재(구력재)의 역사적 기록. 뱃재는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에서 충북 제천시 백운면으로 넘어가는 고개이고, 운학재는 제천시 백운면에서 다시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으로 가는 고개이다

이 길은 조선 6대 왕인 단종이 삼촌인 수양대군의 쿠테타로(계유정란) 폐위되어 영월로 귀양가던 한 많은 비운의 길에 걸쳐져 있다
1457년(세조 3년) 단종은 거쳐하던 창덕궁을 출발하여 배를 타고 원주 문막 흥원창까지 온 다음 부론 단강 귀래를 지나 뱃재를 넘고 화당리를 지나 운학재를 넘고 신림에 도착하여 싸리치와 솔치 베일치고개를 넘어 한양을 출발한 지 7일 만인 6월 28일 영월 청령포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 해가 가기 전(10월) 조정에서 보낸 사자에 의해 목졸려 죽임을 당했으니 그때 나이가 17세였다

 

낮에 지나며 보관해둔 물품을 회수하여 떡국을 끌여서 저녁을 먹고 산행중에 필요없는 물품은 여기 풀숲에 보관해두고 지맥길을 이여간다

천은사 입구에서 산행을 시작한지 4시간 반이 지난 밤 9시 이고 8.8km 지점이다

 

배재고개에서 떡국으로 저녁을 먹고 올라서니 귀래면 과 백운면 갈림길이고 지맥길은 귀래면 쪽으로 진행된다

 

잠시후 또 다른 이정표가 나오고 당연히 옥녀봉으로 방향을 잡고 진행하는데.

바로 경고음이 들려서 확인을 해보니 잘못된 방향이다.

다시 후퇴해서 역주벌 방향으로 진행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분명 우리는 옥녀봉으로 가야 하는데.

진행하면서 좌측으로 신경을쓰며 천천히 진행 했지만 옥녀봉을 가는 동안 좌측에서 올라오는 길은 못 보았다.

역주벌도 이후로 더이상 역주벌이란 이정표는 보질 못했다.

 

오늘 배재고개를 지나면서 왠 잔 봉우리가 그렇게 많은지 올라서면 내려가고 내려가면 올라서기를 수도 없이 반복한다.

그렇게 힘들게 올라서니 4등 삼각점이 있는 632.4봉

 

632.4봉의 삼각점은 엄정 419

632.4봉에서 막걸리 한잔씩 마시고 우측으로 90도 꺽어서 가파르게 내려간다

 

약간의 조망이 트이고 귀래면을 조망한다

 

길도 지저분해지기 시작한다

 

배재고개에서 2km 한시간을 빢쎄게 올라서니 옥녀봉

그런데 원주시에서 세운 정상석에는 높이가 778m라네

오륙스앱에는 714.4m인데 차이가 나도 너무난다

옥녀봉에서 지맥길은 좌측으로 꺽어지고 우측으로 녹재로 내려서며 갈미봉으로 소태재로 이여지는 산줄기가 분기하며 강원도 원주시와 충북 충주시로 갈라지는 도계능선이 갈라진다.

천등지맥 분기점에서는 좌측으로 충북 제천시 백운면이고 우측으로는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이던 것이 여기 옥녀봉에서 강원도 원주시에서 충북 충주시 엄정면으로 넘어가고 좌측은 그데로 제천시 백운면을 유지한다

 

전국에는 옥녀봉이란 이름을 가진 봉우리는 많다.

저마다 여러 전설이 있지만 원주시 귀래면 운남리와 .제천시 백운면 화당리에 걸쳐있는 옥녀봉에도 오랜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이곳 옥녀봉에는 이여송 관련한 이야기가 있다. 병자호란 이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에 원군으로 와 수려한 강산을 종횡무진으로 싸다니며 왜적을 만나 싸우는 것을 여벌로 치고, 오로지 조선의 명산 혈기를 끊는 것을 일로 삼아 혈안이 되어 있었다. "허허 중국에도 저런 산은 없는데 동이(東夷)의 나라에 이런 인걸이 나올 산이 있다니…" 이러한 탄식은 원주 땅에서 한강을 끼고 건너다보고 있던 이여송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이여송이 바라본 것은 인걸이 나올만한 산세를 가진 외봉오리 옥녀봉(玉女峰)이었던 것이다. "여봐라 거기 아무도 없느냐?"

"옛 장군, 수하 좌군대장이 들어 있습니다."

"좌군대장, 어서 가공철침(可恐鐵針) 5개와 고초 2가마를 대령하여라."

“옛 장군, 여봐라 가공철침 5개와 고초 2가마를 대령하여라”

“그런데 장군님 어찌 이런 물건을 들이라 하시는 것인지요."

"저기 저 산을 한번 보시게. 저 산은 보기 드문 명산이요, 또한 형세가 좋아 가히 천하 대지로서 명당을 이룰만한 자리일세."

"제 천한 식견으로는 잘 모르겠나이다."

"저 혈을 끊어야 하네. 저 혈을 타고나는 자 우리 중원을 노릴 것이네."

"알겠습니다. 장군. 그럼 수하들을 채근하고 오겠나이다."

"어서 준비하게." 그러나 옥녀봉의 혈을 끊고자 강을 건너보니, 놀랍게도 그 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이여송은 이상히 여겨 다시 강을 건너 그 자리를 바라보니 틀림없는 청룡등천지혈(靑龍登天之穴)이 분명하였다. 이여송은 재차 그 자리를 눈 익혀 다시 현장에 이르러보니 또 그 자리가 눈에 띄질 않는다. 이렇게 하여 이여송이 옥녀봉 명당을 파혈하기 위해서 강을 다섯 번이나 건넜으나 끝내 그 자리를 찾지 못하고, 마을 어귀에 있는 정자나무 밑에서 최후로 그 자리를 확인하고서도 현장에 이르러 실패하자, "이 자리는 하늘이 보호하는 자리인 것 같네, 그만 이제 돌아가야 겠구먼. 나 이여송이 이곳에서 이렇게 포기해야 한다니 참 어이없는 노릇일세."

마지막으로 확인한 정자나무를 이여송이 `끝으로 정자나무 아래 앉아` 포기한 자리라 하여 `끝정자` 라는 이름이 붙어 오늘에까지도 그 이름이 내려오고 있다.

 

원주 옥녀봉에서 100여미터 진행하면 충북 충주시에서 세운 옥녀봉이란 정상석이 하나더 있다.

여기는 높이가 702m라고 되여있다

 

충주 옥녀봉에서 한번더 인증을 남긴다

 

갑자기 시루봉이란 정상석이 나타나고 확인을 해본다.

오룩스앱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는 무명봉이고 동아지도에는 시루봉 734m로 표시되여 있다.

 

여기가 오륙스앱에 표시되여 있는 시루봉

 

충북 제천시 백운면 화당리와 충주시 엄정면 유봉리/가춘리의 경계를 이루는 시루봉에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아주 먼 옛날 이 산 남쪽 엄정 방면에 아들을 못 낳는 아낙네가 산꼭대기에서 시루떡을 놓고 고사를 지내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에 따라 시루떡을 놓고 고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고사를 지내는 중 갑자기 세찬 소낙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한나절이 지난 뒤 비가 그치자 정신을 차린 아낙네 눈앞에는 시루떡을 놓았던 바위꼭대기만 남고 그 나머지 세상은 온통 물바다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배재 방면에서 배 한 척이 둥둥 떠 고개를 넘어오고 있었다.

이 전설에 의해서 시루봉이라는 산 이름과 배재라는 고개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시루봉과 관련해서 왜정 때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사악한 일본은 우리나라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전국에 산재한 명산마다 혈자리에다 혈맥을 끊는 쇠나 구리로 만든 침봉(鍼棒)을 박았다. 이때 일본인들은 시루봉 정상에도 침봉을 박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산을 오를 때마다 고만고만한 봉우리 여러 개가 이어진 산세 때문에 정확한 혈자리를 찾지 못하고 침봉을 박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시루봉의 혈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해방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엄정면에서는 장군과 명인 및 걸출한 인재들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시루봉을 지나고 702.7봉오름이 시작된다

 

지맥 하시는님들 히내라는 선생님의 응원글이 나타나면 지금까지 힘들엇다 던가 아니면 지금부터 힘들어 진다는 뜻이다

 

제법 힘들게 올라서면 702.7봉

702.7봉에서 내림길은 가파르기도 하고 아무런 안전시설이 없는 상당히 위험스런 구간이 한참동안 이여진다.

 

위험구간을 무사히 통과하고 바윗길을 요리죠리 올라서면 671.7봉

 

오늘은 봉우리 하나 넘기가 참으로 힘들다

짧은 거리에 급오름 급 내림이 계속된다

 

678.5봉의 삼각점은 확인을 할 수 없고

 

오늘은 랜턴하나로 둘이서 진행하다보니 오로지 땅바닥만 처다바야 하고 다른데로 눈을 돌릴 틈이 없다보니

어느새 678.5봉에서 한시간이나 지난 지점인 602.8봉에 올라선다

 

602.8봉을 지나고 묘지가 나오면서 히미한 가시밭길을 내려서니 임도가 나온다.

이정도 임도면 고개의 지명이 있을텐데.

수많은 지도를 찿아 보아도 지명이 표기된 지도는 찿을 수 없었고 많은 선답자들의 산행기에도 이곳에 지명을 기록한 산행기를 보질 못했다.

 

임도에서 좌측으로 20여 미터 이동해서 산으로 올라간다.

 

법광님의 표지기에는 1차끝 이라고 한걸보니 여기서 탈출을 했군요.

 

지명을 알수 없는 임도에서 27분 올라서니 오늘 구간에 유일하게 이름을가진 오청산에 올라선다

 

천왕봉이를 모델로 인증을 남기고

 

 

오청산에서 20여분 내려가니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거 같은 커다란 바위 하나를 만난다

 

중반에 그토록 빢쎄게 오르내리 더니 후반들어 조금 편안해지고 632.3봉에 닿는다

 

484.7봉에 올라서니 어느새 날이 훤히 밝았다

 

조망은 안트이지만 숲사이로 이미 떠오른 일출을 잡아본다

 

좌측 아래로 안게에 힙싸인 원서천이 내려다 보이고 건너편에 구학산과 주론산을 당겨본다

 

오늘 구간에 마지막봉인 533.5봉에 닿는다

 

 

533.5봉을 지나면서 검은 비닐 차양망을 둘러친 어수선한 잡목길을 내려서니 천등지맥 1구간 날머리인 다릿재에 떨어지고 선생님께 산행 잘했노라고 말씀 드리니 수고 했다며 푹 쉬었다가 올라가라 하신다..

 

 

다릿재는 충주와 제천을 잇는 4차선 도로가 조성되기 전까지만 해도 유일하게 두 도시를 잇던 간선도로였다

그러다 10여 년 전에 새 도로가 뚫렸고, 이 때 다릿재 터널이 생기면서 지금은 잊혀진 도로가 되고 말았다

 

다릿재는 박달재와 더불어 제천에서 충주로 통하는 관로에 위치한 대표적인 고개였다. 박달재와 천등산의 안부에 국도 38호선이 개설되어 많은 차량이 이 길을 왕래하였는데, 2007년 국도 38호선의 직선화 사업이 진행되어 다릿재 터널이 개통되면서 다릿재는 본래의 고개로서의 기능을 점차 잃게 되었다.

다릿재를 월현(月峴), 다락재 등으로 부르고 있으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달아치(達阿峙)’라고 되어 있다.

다릿재에서 북쪽 소월리와 북동쪽 대월리의 지명에 모두 달 월(月)을 사용하고 있어 달[월(月)]과 관련된 지명이라 판단된다. 『대동여지도』에 원서면 박달치(朴達峙)에서 서쪽으로 도로를 따라 목계(牧溪)로 이어지는 고갯마루에 ‘달아치’가 있다고 기록한 것을 볼 때, ‘다다를 달(達)’과도 관련이 있을 듯하다.

다릿재는 오청산[652m]과 천등산[807.1m]의 사이의 고개로서 해발 고도는 374m이며, 조선 시대에 다릿재를 지나는 관로는 제천에서 충주 방면으로 가는 길은 ‘경도대로(京都大路)’, 충주에서 제천 방면으로 가는 길은 ‘원서소로(遠西小路)’라고 불렀다.

2003년 12월 옛길에서 북서쪽으로 약 1.3㎞ 지점의 능선에 다릿재 터널이 준공되고, 원서교의 4차선 직선화로 제천~충주 간 소요시간이 15분 정도 단축되었다. 특히 제천·단양 지역에서 생산한 시멘트를 수송하는 대형 화물차를 비롯하여 승용차와 버스가 다릿재 터널로 통행하면서 다릿재를 통과하는 차량이 감소하여 옛길처럼 한적해졌다. 현재 ‘천등박달로’라는 도로명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소요경비

이동거리=446km(왕복)

유류비=29.730원(연비15km/디젤1.090원)

톨비=갈때 5.200원/올때 없음

등=30.000원

합계=64.930원